나는 이렇게 ‘기도수행’ 했다 (262호)

6년을 사귀어 온 사람의 아버지가 완강하게 결혼을 반대한다. 그 반대하는 심정이야 백번 이해가 된다. 철학과를 졸업했단다. 당연히 취직 힘들겠지. 거기다 4남매의 장남이란다. 무남독녀 외동딸을 주고 싶겠는가? 나 같아도 당연히 결사반대다.

그런 와중에 동해안 겨울 여행을 하게 되었고, 아는 스님이 힘써 주셔서 낙산사 홍련암에서 하루를 자게 되었다. 알아주는 관음기도 도량인 홍련암! 정말 열심히 염불기도를 올렸다. 다음날 주변을 돌다 보니 마침 해수관음상이 완공 직전이라, 마지막 손질을 위한 사다리와 목조 시설이 보살상에 걸쳐 있었다. 그걸 타고 보살상 발등에까지 올라가 절을 올리고 기도의 마무리를 지었다.

조금 있다가 사귀어 온 사람의 아버지가 전화를 해서 집으로 내려오란다. 급히 내려갔더니 하시는 말씀, “결혼 하거라!”였다.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꿈에 나와서 “오래 살지도 못할 양반이 왜 젊은 사람들 앞길을 막고 있느냐!”고 나무랐단다. 그 꿈을 꾸시곤, “내 명이 얼마 남지 않았나보다.”고 탄식하시곤 마음이 확 바뀌셨단다.

그래서 급히 결혼식을 올렸다. 바로 지금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과……. 이 이야기를 들은 모든 사람들이 관세음보살님께 기도한 가피를 받았다고 한다. 생각하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이와는 다른 나의 기도 이야기가 있다. 대학교에서 학생처장이라는 소임을 맡았던 적이 있다. 무사히 임기를 마치는가 싶었는데, 임기 끝 무렵에 대형 사고가 터져 버렸다. 학교 축제 기간에 학생들이 설치, 운영하던 놀이기구에서 여학생이 떨어져서 사망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풋풋한 새내기 여학생의 꽃 같은 생명이 스러진 사고, 그 아픔과 슬픔을 어찌할 것인가?

그런데 그에 대한 애도도 애도지만, 학교 차원에서는 이 사태를 어떻게 무마하느냐가 큰 문제였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일차적인 책임이 학생과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담당하는 학생처장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자식을 잃은 슬픔과 아픔에 거의 미칠 것 같은 상태에 있는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과 참으로 어려운 대면을 하면서, 생명이 스러진 것에 대한 보상이라는 것을 두고 ‘협상’이라는 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직면한 것이었다.

총장님을 비롯한 모든 관계자들이 학생처장이 힘든 일을 맡았다며 위로와 격려를 하고, 무사히 소임을 다해 학교가 큰 어려움에 처하지 않게 되기를 빌어주었다. 그 큰 짐을 맡은 마음, 처음에는 참으로 아득하였다. 그렇지만 이렇게 마음을 추슬렀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으로 부끄럽지 않게 이 일을 헤쳐 나갈 수 있기를!” 참으로 기도하는 마음이었다. 일단 자식을 잃은 부모님 마음에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임하였는데, 그것만으로는 되지 않는 일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대학이라는 크다면 큰 기관의 위상과 이익을 지키는 책임이 있었다. 그 두 가지를 지켜가면서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참으로 많은 일들을 겪었고 또 반대로 그 과정에서 배운 것도 많았다. 빈소에서 두들겨 맞는 꼴을 당하기도 했고, 옷이 찢기는 일도 있었다. 다행히도 처음 마음을 제대로 다진 덕분이었을까, 모든 협상의 과정에서 한 번도 내 언성이 높아진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학교의 위상과 이익을 지나치게 낮춘 일은 없었다고 자부한다.

그 결과 원만하게 일이 수습되어 5일 만에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운구를 하여 교정을 떠나기 전, 학생이 다니던 대학 건물 앞에서 이루어진 영결식에서 그 힘든 과정의 큰 보상을 받았다. 사망한 학생의 큰아버지가 유족대표로 인사를 했는데, “모든 과정을 참으로 따듯한 마음으로 성실하게 이끌어 나가, 아픈 일이지만 이렇게 마무리를 하게 해 준 성태용 학생처장에게 감사드린다.”는 내용이 있었다.

유족의 대표가 학교 관계자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는 것은 참으로 드문 일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참으로 나의 기도가 이루어졌다는 큰 감동이 있었다. 부처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이 샘솟았다고 할까? “부처님 덕에 못난 제가 그래도 이만큼 살고 있습니다.”하는 마음으로 다시 손을 모았다. 두 이야기 모두 내 이야기지만, 정말 가슴이 뭉클한 감동 속에서 부처님께 감사를 드린 것은 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참된 기도였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 경험을 이야기하다보면 자연 기도란 무엇일까, 또 어떻게 해야 될까를 생각하게 된다.

당첨될까봐 복권을 안 산다는 분이 있다. 복권에 한 번 당첨되면 정상적인 삶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다. 자기의 노력이 들어가지 않은 횡재가 갑자기 닥치면 삶 자체가 망가질 우려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성취될까봐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분도 있다. 무슨 일만 생기면 기도하러 달려가는 삶이 될 것 같아서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해서 어떤 일을 이룩하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존재에게 빌어서 무엇을 이룩한다는 방식은 마찬가지로 이상한 모습을, 삶을 만들 위험성이 있다.

물론 이 이야기는 기도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기도의 모습에 대한 비꼼과 경계를 담고 있는 것도 틀림없다. 지금 많은 절들, 아니 그것을 넘어서 모든 종교계에서 행해지고 있는 기도들의 모습을 보면 이런 비꼼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를 살펴보자. 우리가 일반적으로 행하는 기도가 정말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의 삶은 개인적인 인간의 삶으로 보면 참으로 불행하다고까지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왕자로 태어났다지만, 부처님 열반 전에 망한, 강대국 사이에 끼어 위태롭기 짝이 없는 약소국의 왕자가 행복할 수 있었을까?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평생 걸식을 한 삶이 일반적인 기준으로 행복한 삶이었을까?

열반 전에 사리불, 목건련 같은 가장 사랑했던 제자가 먼저 죽었을 때 느낀 괴로움은 또 어떠했을까? 그렇게 당신의 삶도 제대로 챙기지 않으신 분에게 모든 일을 이루게 해달라고 비는 일이 과연 될 일인가? 아는 게 병이라고, 그런 생각이 들면서 기도라는 것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기도란 쉽게 말하면 빈다는 말이다. 빈다는 말은 ‘바람’이 있다는 이야기이고. 그 ‘바람’과 ‘빔’ 사이가 올바르게 맺어져야 한다. 올바르게 맺어져야 한다는 것은 올바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올바른 방식이란 기도를 통해 나의 삶이 바뀌어나가는 그런 기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보살님을 만능의 종처럼 생각하는지, “이것 해주세요, 저것 해주세요.”하는 방식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기도를 통해 내가 기도 드리는 대상의 모습이 나에게 옮겨오는 기도, 그러한 기도가 불교 기도의 근본이 아닐까? 그것을 ‘감응도교(感應道交)’, 즉 부처님 마음과 중생의 마음이 서로 통하여 합쳐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그 방식이 바로 올바른 기도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기도를 드리는 근본 마음에서부터 올바른 시각이 자리해야 한다. 부처님이나 보살님께서 인색하게 복을 움켜쥐고 있다고 기도 열심히 드리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조금씩 나눠주시겠는가? 그렇게 불보살님을 본다면 그 근본이 틀린 일이다. 그런 마음으로 기도를 드린다면 그 마음이 이미 부족에 허덕이는 마음이요, 그런 마음에 복이 깃들 리가 없다.

불보살님은 이미 모두 베푸셨다. 우리는 그 크낙한 가피를 이미 받았다. 기도란 이미 받은 그 큰 은덕을 확인하는 일이여야 한다. 이미 베풀어주신 그 큰 복덕을 모르고 허덕이는 그 미망을 깨드리는 것이 기도여야 한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기도가 올바른 기도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서는 점점 기도에 대한 생각이 소박해져 가는 것을 느낀다. 내가 살아 온 삶을 생각하면 참으로 내가 잘나서 그렇게 살아 온 것이 아니다. 부처님과 많은 선현들의 공덕, 부모형제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희생과 돌봄 위에 내 삶이 서 있는 것을 절감한다. 발 한 걸음 떼는 사이에도 무수한 갈림이 있고, 아차 하는 순간에도 나락에 떨어질 수많은 위기가 있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러한 위험들을 비켜가면서 지금까지 이렇게 버젓이 살아 있는 것이 참으로 큰 복이요, 그 사이 무한한 가피가 있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나는 이제 이런 바람을 갖게 된다.

“나를 있게 해준 모든 분들의 은덕, 그 은덕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기를…….”

“지금까지 수많은 위험과 어려움을 벗어나게 해 주신, 그러한 가피의 나날이 이어지기를…….”

이제는 그러한 소박한 바람이 나의 기도가 되리라. 그런 기도 속에 살아가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또한 나의 기도가 되리라!

성태용

건국대학교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학술연구진흥재단 인문학단장, 건국대 문과대 학장, (사)우리는선우 대표를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 〈주역과 21세기〉, 〈오늘에 풀어보는 동양사상〉(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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