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앞잡이가 쏜 총탄 … 관음보살 가피로 살아나

벌써 3월입니다.

몇몇 바르지 못한 사람들이 세상을 어지럽혀도 찬란한 봄은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봄보다 우리들에게 3월은 남다른 의미가 있는 달입니다. 3.1 운동이 일어난 달이기 때문이지요. 3.1 운동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나아가서는 세계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잊을 수 없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그 주역이 바로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스님입니다. 스님은 승려요, 독립운동가요,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요. 그는 1905년 설악산 백담사로 출가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관음기도처로 이름 높은 오세암(五歲庵)에서 보냈습니다.

스님은 이 오세암에서 불경을 공부하고 글을 쓰는 틈틈이, 관세음보살님께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1910년, 일본이 이 나라를 강제로 점령하고 국권을 찬탈하자 망국의 울분을 참을 길 없었던 스님은 1911년 가을, 행장을 수습하여 표연히 만주로 떠났습니다.

스님은 만주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그 곳에 사는 우리 동포들을 만나 막막한 나라의 앞길을 의논하고 서로를 위로하고자 했습니다. 간도지방에 도착한 스님은 동포들을 만나 이역(異域)의 생활을 묻기도 하고 고국의 사정을 전하기도 하였으며, 그 곳의 독립지사들과 협력하여 동포를 보호할 방법과 독립운동의 방향 등을 의논하였습니다.

그리고 민족투사를 양성하는 의병학교를 순방하여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깨우쳐 주고 또 격려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통화현(通化縣)에 갔을 때입니다. 그곳은 이상한 불안이 감격과 희망 속에 뒤범벅된 묘한 분위기에 싸여 있었습니다. 조밥으로 연명하면서도 밤이면 관솔불을 켜 놓고 천하 대사를 논의하는 한편, 화승총을 가지고 조련을 하였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일진회원들 모두가 머리를 깎고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스님들과 구분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본국에서 온 사람에 대해 처음에는 불안으로 감시했고, 그 다음에는 의심으로, 마침내는 목숨을 빼앗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일진회원들과 외양이 비슷한 만해 스님도 그 곳에서 정탐꾼의 혐의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만해 스님을 줄곧 미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스님이 만주 통화현에서도 한참을 들어간 두메산골에서 자고 나오는데, 스님을 바래다준다며 20세 전후의 한국 청년 세 명이 따라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길은 차츰 산골로 접어들었고, 일행은 굴라재라는 고개를 넘게 되었습니다.

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우거져 대낮에도 하늘이 잘 보이지 않았고, 길이라고는 풀숲에 나무꾼들이 다니는 미로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스님의 뒤를 따라오던 청년 한 명이 총을 쏘았습니다. 순간 귓전이 선뜩함을 느꼈고, 연이어 두 번째 총소리가 나자 아픔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또 한 방의 총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이때 스님은 그들을 돌아보며 잘못을 호령하고자 목청껏 소리를 질렀으나, 성대가 끊어졌는지 혀가 굳어졌는지 전혀 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마음으로는 할 말을 다했는데 말소리를 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동시에 피가 물줄기처럼 뻗쳤고 격렬한 아픔이 전신을 휩쓸었습니다. 그러다가 심한 통증이 사라지면서 지극히 편안한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스님은 순간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지금이 생(生)에서 사(死)로 넘어가는 순간이구나. 이제 죽는구나.’ 이윽고 편안한 감각까지 사라지면서 스님은 완전히 혼절하여 죽음의 상태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행했던 신앙이 환체(幻體)가 되어 나타났습니다.

바로 관세음보살이 나타난 것입니다.

‘아, 아름답구나. 기쁘구나.’

앞이 눈부시게 환해지면서 절세의 미인,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어여쁜 여인이 섬섬옥수에 꽃을 쥐고 누워 있는 스님을 향해 미소를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총을 맞고 누워 있는 사람에게 미소를 던지다니!’

순간 스님은 달콤하면서도 분한 감정에 휩싸였습니다.

그 때 관세음보살께서 꽃을 던지며 말했습니다.

“네 생명이 경각에 있는데, 어찌 이대로 가만히 있느냐?”

그 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린 스님은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눈을 뜨고 주위를 살펴보니 날은 어두웠고 피는 마치 봇도랑처럼 흘렀으며, 총을 쏜 청년 가운데 한 명은 짐을 조사하고 다른 한 명은 확인 살인을 위해 큰 돌을 들고 스님을 내리치려고 했습니다.

스님은 황급히 일어나 그 자리를 겨우 피하고, 오던 길로 되돌아갔습니다. 핏자국을 보고 뒤쫓을 그들이 자신들의 마을 쪽으로 가면 안심하고 천천히 쫓아올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스님은 이렇게 한참을 가다가 다시 돌아서서, 어떻게 넘었는지도 모르게 산을 넘어 중국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갔습니다.

그 곳의 마을사람들은 마침 촌장 집에서 모임을 하고 있었는데, 피를 흘리며 들어오는 스님을 보고 지혈을 해주었습니다. 그 때 총을 쏜 청년들이 쫓아왔고, 스님은 그들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쏠 테면 쏘아라!”

그들은 어쩐 일인지 총을 쏘지 않고 달아났으며, 스님은 귀 뒤와 몸에 박힌 총알을 제거하는 큰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마취를 해야 합니다.”

“난 그런 거 필요 없습니다.”

“통증을 견딜 수 없을 겁니다.”

“견디도록 하지요.”

의사가 몇 번이나 당부했지만 스님은 굳이 마다하였습니다. 그리고 수술이 시작되었습니다. 스님은 조용히 눈을 감고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긴장한 쪽은 오히려 의사와 주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빠각빠각.

빠각빠각.

생 뼈를 깎아내는 소리가 방안을 울리는데도 스님은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끝까지 견뎠습니다. 그는 오직 관세음보살님의 명호만 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누구도 알 수 없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끝에 서서도 벗어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 그것은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력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인간이 아니고 활불(活佛)이로다.”

치료를 다 마친 의사는 감탄하여 치료비도 제대로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스님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르러 이렇게 관세음보살님의 큰 가피를 입었던 것입니다.

이후 스님은 불교개혁운동과 독립운동을 하면서 초인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정신력의 힘이 아니라, 총을 맞은 그 때 관세음보살의 가피 아래에서 생사를 초월한 힘을 얻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고난의 칼날 위에 서라고 신신당부했던 만해 또한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그가 죽음과도 같은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 혼자만의 정신력이 아닌,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을 향한, 또한 관세음보살님을 향한 감당할 수 없는 믿음, 그것이 그를 이 나라 최고, 최대의 독립운동가로, 대시인으로 만든 원동력이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누구나 현실은 고통의 바다입니다. 그러나 1919년 3월 우리 민족은 그런 고통을 딛고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불렀습니다. 비록 실패하였지만 푸른 하늘을 보겠다는 의지, 그것으로 하여 3.1 운동은 오늘날의 3.1 운동이 되었지요. 실패와 절망이 오히려, 등불이 된 드문 사례입니다.

고난을 뚫는 힘.

우리 불자들은 그것이 혼자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슬픔을 녹이는 가장 강한 힘은 여럿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다행히 우리 불자들에겐 부처님을 비롯한 수많은 보살님들이 함께 하지 않겠습니까? 2017년 3월, 그 어느 만해 스님이 그리운 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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