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한국불교의 산맥 (263호)

윤창화

도서출판 민족사 대표. 1972년 해인사 강원 졸업(13회).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 졸업(1999). 논문으로는 ‘해방 후 역경의 성격과 의의’, ‘한암의 자전적 구도기 일생패궐’, ‘성철스님의 오매일여론 비판’ 등이 있다. 저서로는 <왕초보, 禪박사 되다>, <근현대 한국불교명저 58선>이 있다.

 

 

근대 초 1906년 원흥사(지금의 창신초등학교 위치)에 동국대 전신인 명진학교(明進學校)가 설립되었다. 명진학교는 조선불교 사찰에서 승려교육을 위하여 세운 최초의 근대적 불교전문교육기관이었다. 이것을 계기로 조선불교계는 승려들에게 근대적인 교육을 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근대적인 방법으로 불교를 탐구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곧 근대 한국불교학의 전개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상현 이능화·석전 박한영·퇴경 권상로·일곤 백성욱·뇌허 김동화·현곡 김잉석·포광 김영수 등이다. 운허 스님·탄허 스님은 근대적인 연구방법은 아니지만, 역경(譯經)에 대단한 업적을 남겼다. 이 가운데 이능화 선생만 거사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승려출신이거나 스님이다. 이 분들은 교육적, 학문적으로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사명감도 대단했다. 학문적 업적이 뚜렷한 근현대 불교학자, 불승(佛僧) 10인을 조망해 보고자 한다.

근대 최초로 대중적 선학개론서 저술
월창月窓 김대현金大鉉

월창(月窓) 거사 김대현(金大鉉, ?∼1870)은 조선 말기를 살았던 거사이다. 한성(서울)에서 공납(貢納)을 관리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유교·도교를 공부한 천재에 가까운 인물이다. 40세를 전후한 무렵에는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고, 중국선(禪)의 경전인 <능엄경(楞嚴經)>을 읽은 후에는 오직 선불교에 전념했다. <능엄경>은 선수행서로서 내용과 언어 표현이 한문화권의 지식층이나 거사, 수행승에게 적합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는 <능엄경>에 매료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선학입문>

하지만 그가 세인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선학입문(禪學入門)>과 <술몽쇄언(述夢瑣言>이라는 두 권의 명저 덕분이었다.

<선학입문>은 중국 천태종 창시자인 천태대사 지의(538~597)의 <석선바라밀차제법문(釋禪波羅密次第法門)>(10권)의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 초심자뿐만 아니라 경험 있는 수행자에게도 필요한 지침서이다. 참선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호흡과 좌선, 그리고 환청(幻聽), 환시(幻視) 등 여러 가지 현상[魔, 禪病]에 대하여 그것을 알아차리고 대처하는 방법인데, 이것을 일목요연하게 간추린 것이 <선학입문>이다.

또 이 책은 조사선이나 간화선 계통이 아닌 순수 인도선에 가까운 수행방법을 제시한 책으로, 천태종의 지관수행(止觀修行)을 위한 지침서이기도 하다. 처음으로 이영자 선생이 <초보자를 위한 선>이라는 제목으로 2007년에 번역 출판(민족사)했다.

<술몽쇄언>은 월창 거사가 어느 날 한낮에 창가에서 졸다가 꿈을 꾸고 나서 쓴 인생에 대한 수필집이다. 삶, 인생은 마치 한낮의 꿈과 같다는 것이 월창 거사의 인생관이다. 그는 자서(自序)에서,

“하루는 창가에 누워 졸다가 그대로 꿈을 꾸었다. 잠이 깨어서 사람들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모두 어리둥절해 하였다. 이에 그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 본 바를 적어 <술몽쇄언>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 말이 자질구레해서[瑣言] 꿈 깬 사람에게는 이야기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뜻이다.”

라고 하였다.

꿈속에서 일어난 일들은 깨고 나면 한낮 허망하기 짝이 없는 아련한 영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 허망함에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기만 하는 때도 있다. 인생도 그와 무엇이 크게 다를까?

한국불교 1600년 역사 집대성 <조선불교통사> 저술
상현尙玄 이능화李能和

상현 거사 이능화(1869∼1943)는 그 유명한 <조선불교통사>(신문관, 1918)의 저자이다. 그는 이외에도 <백교회통(百敎會通)>, <조선도교사>, <조선무속고>, <조선여속고(女俗考)>,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 등을 저술한 근대 최고의 한학자, 한국학의 대가이기도 하다.

그는 유학자 출신으로 독실한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유학과 성리학을 공부했으나 마음으로는 광활한 불교를 좋아했다. 어느 날 창신동 원흥사 법회에 참석했다가 조선불교의 역사에 대하여 묻자 대답하는 스님이 아무도 없었다. 이에 충격을 받고서 전국 사찰과 고승에 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는데, <조선불교통사>를 저술할 때는 완전히 불교에 빠진 상태였다.

그가 어느 정도로 불교에 심취해 있었는지는 1917년 <매일신보>와의 인터뷰에서 “시중에 보이는 것은 모두 불서(佛書)요, 책상 위에 쌓이는 것도 불서요, 촛불 아래서 초록하는 것도 불서요, 누워서 꿈꾸는 것도 불서였다. 오로지 밤낮으로 매달리는 것은 불서뿐이었다.”라고 할 정도로 학자이기 이전에 신심 깊은 신자였다.

또 이능화는 근대 초 거사불교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1915년 발족된 불교진흥회의 핵심 멤버로 간사·이사직을 맡았고, 불교 잡지인 <불교진흥회월보>·<조선불교계>·<조선불교총보>의 편집인 겸 발행인을 맡아 언론을 통한 포교활동에도 대단히 이바지하였다.

<조선불교통사>는 한국불교 1,600년간의 역사적 사료를 총 집대성하고 해설을 붙인 기념비적인 책이다. 이 책은 2권으로서 2,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에 조선불교사의 전반적인 내용을 담아놓았다.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하여 10년 동안 눈만 뜨면 원고를 썼다. 한국불교사 연구에 있어 아직도 <조선불교통사>를 능가하는 책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개척적인 명저이다.

이능화 선생은 신심도 대단했다. 그는 각종 불교잡지에 많은 글을 기고했는데, 글을 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조선불교 사료 발굴을 위한, 또는 각 사찰의 역사적인 자료들을 정리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무속고>·<조선여속고> 등 한국학 자료 정리 분야에도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일본 불교학자 다까하시의 <이조불교>, 누까리야 콰이텐의 <조선선교사> 등도 <조선불교통사>에 힘입은 바가 크다. 말년에는 태고사(조계사)에서 불교를 강의하기도 했다.

한국 문화 전반에 걸친 당대 최고의 석학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

“민족 불교를 살리는 길은 곧 불교인에 대한 계몽과 교육으로만 가능하다.”

석전 박한영(1870~1948) 스님은 근대 최고의 대학승, 대강백으로 한학(漢學)과 한국 문화 전반에 걸쳐 박학다식했던 무소부지(無所不知)의 석학이다. 또 승가상의 사표(師表)이자 교육자로서 평생 후학 양성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고, 독립운동가로서도 한 획을 그은 분이다.

석전 박한영 스님에 대해서는 필자의 짧은 지식으로 논하기에 앞서 당대 최고 지식인들의 평을 들어보는 것이 보다 좋을 것이다.

“석전사(師)를 만나면, 내전이고 외전이고 도대체 모르는 것이 없을 만큼 박식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물어볼 것이 없는데, 석전 선생에게는 물어볼 것이 있다.” (육당 최남선 <石顚詩抄> 발문)

“승속을 불문하고 존경받는 걸승(傑僧)이며, 시사(詩詞)는 이미 옛사람의 반열에 올랐다.” (변영만, 학자, 법률가)

“대관절 박한영과 함께 길을 갈라치면 한국 땅 어디에 가나 그는 모르는 게 없다. 산에 가면 산 이야기, 물에 가면 물 이야기… 이른바 사농공상(士農工商) 무엇에 관한 문제를 꺼내든 간에 그의 화제는 고갈될 줄을 모른다.” (위당 정인보, <石顚山人 小傳>)

위와 같은 근대 명사들의 술회와 같이, 석전 박한영 스님은 승속을 망라하여 불교경전·노장(老莊)·경사자집(經史子集)에 해박했던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다.

석전 박한영 스님은 만해 한용운을 비롯해 당대에 천재로 불리던 오세창·이동영·육당 최남선·변영만·정인보 등 당대 지성인들의 정신적 스승이었고, 만암·청담·운허·이광수·서정주·신석정·조지훈·모윤숙·김동리·조종현 등 내로라하는 고승들과 문인들도 모두 석전 스님의 제자, 혹은 깊이 학은(學恩)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석전 박한영 스님은 1888년 위봉사에서 출가했다. 1896년 구암사 전통 강원에서 강의를 시작한 이후 해인사·법주사·백양사·화엄사·범어사 등에서 강의했고, 1913년에는 <해동불교(海東佛敎)>를 창간하여 불교 유신을 주장하고 불교인의 자각을 촉구하였다. 1914년에는 고등불교강숙(高等佛敎講塾), 1916년에는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의 강사로서 후학들을 지도했으며, 1926년부터는 서울 안암동 개운사(開運寺)에 강원을 개설하여 불교계의 영재들을 배출하였다. 1931년에는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전 교장이 되었고, 광복 후에는 조선불교 조계종의 제2대 교정으로 선출되어 불교계를 이끌다가 1948년 정읍 내장사(內藏寺)에서 입적하였다. <석전시초(石顚詩鈔)>와 <석전문초(石顚文鈔)>, <석림수필(石林隨筆)> 등이 있다.

<한국사찰전서>·<한국불교사료> 저술
퇴경退耕 권상로權相老

퇴경 권상로(1879~1965) 선생은 한국 불교학계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또 학승(學僧)으로서 한국 불교학의 정립과 불교사상 연구에 힘썼던 분이다. 문장가로도 이름이 높았으며 ‘해석에는 권상로’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명망이 대단했던 학승이다. 또 묵화(墨畵)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그가 그린 파초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그 경지가 대단했기 때문이다.

퇴경 선생은 해박한 한학 실력을 바탕으로 많은 사찰관계 불교사료를 모아 집대성시켰다. 그것이 <한국불교사료(韓國佛敎史料)>(보련각, 1979)와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동국대학교출판부, 1979)이다. 이 책들에 우리나라 전통 사찰의 역사적인 자료 등이 모두 취합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그는 강원의 학인들에게 역사 인식을 심어주기 위하여 최초의 근대적 불교사 개설서인 <조선불교약사>를 저술했다. 이 책은 불교가 전래된 이후의 1600여 년간의 한국불교사 전체를 다루고 있다. 편년체로 단순히 있는 사실을 나열하고 있지만 후대의 한국불교사 관련 개설서는 모두 이 책을 바탕하고 있다. 특히 부록으로 신라·고려·조선시대에 명멸했던 각 종파에 대한 제종종요(諸宗宗要), 불조약계(佛祖略系)와 우리나라 역대 왕들의 인명색인을 만들어 놓은 점 등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상당히 근대적·학문적인 체계를 갖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938년에는 <조선왕조실록>과 <고려사>에 수록되어 있는 불교관련 기록들을 발췌해 <이조불교초존(李朝佛敎鈔存)>과 <고려사불교초존(高麗史佛敎抄存)>을 편찬했다. 81세의 나이에 <한국지명연혁고(韓國地名沿革考)>를 발간하여 삼국시대부터 조선·대한제국까지 각 지방의 명칭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다. 그는 한국학의 대가였고 불교학의 석학이었다.

퇴경 권상로 선생은 경북 문경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14세 때에는 문경 백일장에 나가 장원급제를 하는 등 일찍부터 문경 지방에서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다. 18세 때인 1896년에 김룡사로 출가했고, 1903년 사불산(四佛山) 대승사(大乘寺)와 윤필암(閏筆庵) 등 여러 사찰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1906년 경북 5본산에서 세운 경흥학교 한문 교사, 1909년 함창군 성의학교에서 한문 및 측량 교사, 그리고 1911년 사불산 대승사 주지를 지냈다.

그는 1931년부터 1944년까지 중앙불전(동국대 전신) 교수로 있으면서 후학을 양성했고, 1953년에는 동국대학교 초대 총장이 되어 학교 발전에 기틀을 마련했다.

한국불교 종파사·오교구산 학문적 정립
포광包光 김영수金映遂

포광 김영수(1884∼1967) 선생은 승려 출신의 불교학자이다. 그는 오로지 학문에만 심혈을 기울였던 불교학자이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두 편의 논문에 집약되어 있다. 1937년 <진단학보> 8집에 발표한 <오교양종(五敎兩宗)에 대하여>와 1938년 <조계선종에 대하여>(진단학보 9집)이다. 이 논문은 한국불교 종파사와 오교구산 성립에 대한 최초의 학문적 고찰이었다.

<오교양종에 대하여>는 신라시대에 교종의 5개 종파인 열반·계율·법성·화엄·법상종이 성립되었고, 선종에서는 조계종과 천태종 두 개 종파가 성립되었다고 본 것으로 한국불교 종파(宗派) 성립의 실마리를 잡아주는 역할을 한 논문이다.

그리고 <조계선종에 대하여>는 실상산문·동리산문·봉림산문 등 구산선문이 신라시대에 성립되었다고 본 것으로, 비록 중국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한국 선종은 중국 임제종에서 전래된 것이 아니고, 신라 때부터 구산선문 형성을 통해 독자성을 갖고 발전한 것이라고 하여 한국불교의 독창성을 설명했다.

그가 제시한 오교구산설은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도 그대로 수용되었으며, 80년대까지 정설로 정착되었다. 또 이 두 편의 논문은 한국불교학계에서는 최초로 발표된 논문 형태의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오교양종설과 구산선문설은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여러 이설이 제기되었고 정설의 위치에서 후퇴했지만, 최초로 한국불교를 종파적인 시각에서 정리하고 또 한국불교를 오교양종으로 파악, 정리하여 큰 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효시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그는 학문과 인격을 겸비한 학자였고 인자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불교학뿐만 아니라 동양철학과 고전에도 대단히 박학했다. 백성욱·김법린·조명기·김인식·황성기·홍정식·류병덕·한종만·한기두 교수 등이 모두 그의 학덕을 입은 이들이다. 동국대·전북대·원광대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진양성에 매진했다. 1967년 1월 10일 입적하였다. 전집인 <한국불교사상논고(韓國佛敎思想論攷)〉가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불교사전> 간행
운허耘虛 용하龍夏

운허(1892~1980) 스님은 일평생 한글대장경 간행과 불교경전의 한글화에 헌신했던 스님이다. 그의 염원·발원은 불자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우리말 경전’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한글대장경 완간은 ‘운허 스님의 염원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운허 스님이 1961년 편찬, 간행한 한글 <불교사전>(동국역경원, 1961)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불교사전으로서 불교 전래 후 1600년 만의 일이다. 실로 한국불교 문화사, 불교 교리의 대중화와 불교 출판의 역사에서 매우 크게 기여한 기념비적인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불교사전>은 한문 등 어학에 취약한 대중 불자들에게 큰 환호를 받았으며 강원 학인들과 불교를 처음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도 매우 유용한 사전이었다.

또한 운허 스님은 한글대장경 외에도 <능엄경>·<범망경>·<열반경>·<법화경> 등 수많은 경전을 번역하여 불교경전 한글화의 초석을 마련하였는데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게 의역한 것이 특징이다.

운허 스님은 평북 정주 출신으로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한 후, 21세(1912년) 때 평양 대성중학교를 마쳤다. 30세가 되던 해, 1921년 5월 강원도 유점사로 입산, 범어사와 개운사 강원에서 대교과 과정을 마쳤다. 그 후에는 봉선사·동학사·통도사·해인사 등에서 강사를 맡아 승려 교육에 매진했다.

또 그는 독립운동과 청년교육에도 뛰어들어, 봉천의 동창학교, 배달학교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서로군(西路軍) 기관지인 <한족신보>의 사장을 맡아 계몽운동도 전개했으며, 비밀 독립단체인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도 헌신했다.

1936년에는 경기도 봉선사에 홍법강원(弘法講院)을 설립하여 후학 양성에 주력하였다. 1946년 광동학교를 설립하고 1964년 동국역경원을 설립하고 초대 원장이 되었다. 1980년 11월 양주 봉선사에서 89세의 일기로 입적했다.

 

 <금강경> 독송운동 이끌며 대승불교 실천
일곤壹壼 백성욱白性郁

백성욱(1897~1981) 박사는 한국 최초로 독일 철학박사를 받았다. 또한 그는 독립운동가였고 정치인이자 교육자로서 많은 역할을 했다. 1945년 8·15해방이 되자 그는 애국단체인 중앙공작대를 지도하며 민중계몽운동을 했고, 정부 수립 후 1950년에는 내무부장관으로 임명되어 이승만 박사와 함께 건국의 기초를 다졌다. 그 후에는 동국대학교 총장으로서 종립대학 발전에 기초를 다지는 데 진력했으며, 만년에는 입적할 때까지 <금강경> 독송운동을 전개했던 진정한 불교도였다.

1897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1910년 14세의 나이로 정릉 봉국사로 들어가 최하응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17년에는 동국대학교 전신인 불교중앙학림에 입학하여, 그곳에서 당시 중앙불전의 강사였던 만해 한용운 스님을 만나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3·1운동 때에는 중앙학림의 학인들을 이끌고 만세운동을 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쉽지 않자 중국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이때 이승만 박사 등 당시 임시정부의 주요 인사들과 교류하게 된다. 그가 정부 수립 후 내무부장관이 되었던 것은 이승만 박사 등 임시정부요인들과의 인연, 그리고 독일에서 선진문물을 익히고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미국보다 독일 유학을 택했던 것은 철학과 선진 문물을 함께 공부하자면, 서양철학의 본고장인 독일이 더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독일 벌츠부르그대학 철학과에 들어가서 고희랍어와 독일신화사(獨逸神話史) 및 문명사와 천주교의식 등을 연구하였다. 1925년 유학길에 오른 지 3년 만인 그 해 10월 <불교순전철학>이라는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학 박사 1호가 되었다.

‘백성욱 박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미간에 있는 육계 백호상과 <금강경> 독송 운동이다. 이마 중앙에 있는 커다란 미간 백호상은 마치 부처님 모습을 연상케 했다. 또 그의 <금강경> 독송 운동은 대승불교도의 실천행이기도 했다. 불교관계 잡지 등에도 많은 글을 발표했고,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 후에는 중앙불전 교수로 있으면서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지금도 많은 제자들이 그의 뜻을 받들어 <금강경> 독송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한국 화엄학·삼론학 연구 선두주자
현곡玄谷 김잉석金芿石

현곡 김잉석 박사(1900~1965)는 한국 화엄학의 독자성을 정립시키고자 노력한 학자다. 그는 자신의 대표적 저술인 <화엄학개론>(동국대출판부, 1960)에서 중국의 화엄학승들에 대해 매우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는 반면, 한국의 화엄학승들에 대해서는 열 배가 넘는 지면을 할애하여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전형적인 학자인 그는 화엄학은 물론이고 그 밖의 불교학의 여러 문제에 대해서도 기존의 학설을 무의식·무비판적으로 수용·추종하는 것이 아니고, 논리적·주체적인 사고로 예리하게 고증 고찰한다. 철학적 통찰력이 남달랐던 그는 자신이 한국의 화엄학자라는 것에 대하여 대단한 긍지를 갖고 있었다.

그는 “화엄학은 현수(賢首)에 의하여 대성했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 해동 조사(원효, 의상 등)들의 공적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수가 ‘화엄무진교의(華嚴無盡敎義)’를 세우는 데 참고했던 중요한 책은 <대승기신론>이다. 그런데 그 <대승기신론>이야말로 원효의 <대승기신론 해동소>에 사숙(私淑)한 것이다. 또 현수법장은 <화엄경 탐현기(探玄記)>에서도 원효의 <화엄경소>를 인용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중국 화엄학을 대성시킨 현수법장의 <기신론의기(義記)>와 <화엄경 탐현기> 등은 모두 원효의 <해동소>와 <화엄경소>를 참고하여 저술한 것으로서, 오히려 중국 화엄학승들이 원효 등 한국 화엄학승들의 저술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그가 최초로 발견, 제시한 학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그는 신라 화엄학의 학통 문제에 대해서도 중국 화엄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즉 한국 화엄은 <화엄경>을 바탕으로 독자적으로 형성된 화엄학으로서 중국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문화적 사대주의에 젖어 있는 한국불교학계에서 이런 견해는 마땅히 높게 평가해야 할 일이다.

그는 삼론학 연구에도 힘썼는데 ‘고구려 승랑과 삼론학’, ‘승랑을 상승한 중국 삼론의 진리성’ 등에 관한 논문을 발표해 삼론학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불타와 불교문학’도 그를 대표하는 논문이다. 동국대학교 교수, 불교대학장을 지냈고 1965년 65세의 일기로 작고했다.

한국불교학 모든 분야 기초를 정립
뇌허雷虛 김동화金東華

뇌허 김동화(1902~1980) 박사는 한국 불교학의 모든 분야에 기초를 정립한 거장(巨匠)이다.

그의 대표작은 무수하게 많다. <불교학 개론>, <불교교리발달사>, <원시불교사상>, <대승불교사상>, <구사학>, <유식철학>, <불교윤리학>, <선종사상사> 등 묵직한 책만 20여 권이나 된다. 불교학의 중요한 분야는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그는 한국불교학의 기초를 다지는 책들을 펴냈다.

그 가운데서도 <불교학개론>과 <불교교리발달사>가 가장 대표적인 저술이다. <불교학개론>은 근대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학 개론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원시불교 교리를 비롯하여 아비달마 불교, 소승불교, 그리고 대승불교의 여러 가지 교리와 학설, 사상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후학들로 하여금 보다 쉽게 불교를 공부할 수 있도록 만든 책이다.

<불교교리발달사>는 그의 여러 가지 저서 중에서도 결정판에 속한다. 복잡한 불교교리 발달과정을 체계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후학들로 하여금 한층 쉽게 전체적인 모습을 이해할 수 있게 간추린 책이다. 불교교리가 시대적·사상적, 또 각 부파나 학파를 거치면서 어떻게 변천·발달해 왔는지 그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서술한 책이다. 불교학을 전공하려는 학도라면 반드시 숙독해야 한다.

그는 “깨달음을 얻었다면 현실적으로 중생을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고통 없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써야 하는데,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을 목표로 설정해 놓고도 실천하지 않는 깨달음은 무의미하다.”고 서론에서 말했는데, 불교의 목적과 역할 등에 대한 정의로서 아직도 이만한 정의가 없을 것이다.

김동화 박사는 실천하는 수행자이기도 했다. 그는 정각신행회를 조직하여 활동했는데, 그가 내세운 3대 항목은 ‘누구라도 믿을 수 있는 불교’ ‘누구라도 행할 수 있는 불교’ ‘누구라도 전할 수 있는 불교’였다. 또한 ‘복’만 비는 재가자들의 기복신앙을 꾸짖으며 수행과 실천을 강조하였다.

그는 “학생들은 나의 생명수”라고 하여 은퇴 후에도 동국대에서 매주 10시간 씩 강의했다. “집에 있을 때는 기력이 없다가도 학교에만 오면 힘이 솟구쳐 열강을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김동화 박사는 불교학자로는 유일하게 학술원상을 수상(1972)했으며, 학술원 종신회원이었다.

<신화엄경합론> 완역 간행한 대석학
탄허呑虛 택성宅成

탄허(1913~1983) 스님은 대석학이다. 스님으로서 불교뿐만 아니라 유학과 도가(道家)의 노장(老莊)에도 능통했으며, 왕양명의 심학(心學)에도 해박했다. 그의 사상적 특징은 유불도의 가르침과 사상을 하나로 회통하여 통합시켰던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금세기 고승이나 학승 또는 유학자 중에 유불도를 통관했던 이는 없다. 유학자는 불교와 노장(老莊)을 모르고, 불승은 유학은 알아도 노장에는 입문 정도에 불과한 상황에서 유불도에 능통하여 회통시켰다는 것만으로도 탄허 스님의 업적은 대단하다.

하지만 탄허 스님의 역할과 업적을 평한다면 무엇보다도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 완역 및 간행(1975년)이라고 할 수 있다. <신화엄경합론>은 총 23권으로 화엄학의 3대서인 <화엄경> 80권과 <화엄론> 40권을 현토 완역했으며, 주석서인 청량징관의 <화엄경소초(華嚴經疏鈔)> 150권 가운데 70%를 삽입했고, <현담> 8권, <화엄요해>까지 현토·번역하여 출판한 것이 ‘화엄학전서’이다.

‘화엄학전서’는 23권이며, 각권 540쪽으로 총 1만2,400여 쪽에 달한다. 6만2,500여 장이나 되는데, 번역 원고를 혼자 10년 동안 썼고, 이후 간행까지 했다는 것은 한 사람의 작업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뿐만 아니라 전통강원의 교재인 <초발심자경문>, <치문>, <사집>(서장·도서·절요·선요)과 <사교>(능엄경·기신론·금강경·원각경), 그리고 한국 선불교에서 중시하는 <육조단경>과 <보조법어>도 우리말로 번역 간행하였다. 또 동양학의 중요한 경전인 <주역선해>·<노자>·<장자> 등도 완역했다.

또한 탄허 스님은 동양학·인문학을 바탕으로 한 전문 학자, 인격을 갖춘 지도자급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1956년 강원도 월정사에 오대산 수도원을 개설했다. 혼자 하루에 8시간씩 <화엄경>·<영가집>·<육조단경> 등 불교경전과 <노자>·<장자>·<주역> 등 동양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고전을 강의했다. 목적은 오로지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을 하여 불교를 일으키고 한국 사회를 일으키고자 하였다.

탄허 스님은 천재적인 분으로 동양학의 경우 텍스트 없이 꼬박 2년을 강의하는 분이다. 2시간 강의에 깨알 같은 초서 글씨로 대학 강당의 큰 칠판을 5~6번 채운다.

1934년 22세의 나이로 오대산 상원사에 입산하였으며 입산 2년 만에 강원도 3본산(월정사·유점사·건봉사) 승려연합수련소의 강의를 맡아 학문의 깊이를 불교계에 드러내었다. 1951년 강원도 월정사 주지를 하고 1966년 동국대학교 대학선원 원장을 맡아 불교철학을 강의하였고 1967년 조계종 중앙역경원 초대원장을 지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