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한국불교의 산맥 (265호)

화승_ 문고산 (文古山, 1850년경~1930년 이후)

속성은 문 씨이고 당호는 고산(古山), 법명은 축연(竺演)으로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의 화승으로 알려져 있다. 문고산은 함께 소개하는 석왕사의 김석옹과 함께 조선에 두 명 뿐인 ‘불화의 명인’으로서 1910년대 신문 지상에 소개될 만큼 당대 유명한 화승(畵僧)이었다. 이후 1920년대 중반까지도 그는 ‘전 조선의 모범이 되는 화승’으로 알려져 있었고 솜씨가 빠르고 작품이 훤칠한 데는 당대 제일이었다고 한다. 또 그림을 보는 감식안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현전하는 불화들로 미루어 보아 문고산은 1870년대를 전후로 하여 1930년까지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는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불화 제작에 있어서 밑그림을 새롭게 출초(出草)해 내거나 서양화법, 즉 입체감을 두드러지게 표현하는 명암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등 이전 시기 화승들과는 다른 불화 제작 태도를 보인다. 또 그가 제작한 불화들 중 많은 수가 근대기 새롭게 유입된 신문물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이 제작한 불화에 낙관을 하는 등 불화를 제작하는 화승이었지만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을 강하게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쌍월당성활진영', 20세기 초, 비단에 채색, 109.5X69.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출처:<마곡사 근대불화를 만나다>, 국립공주박물관, 202년, p. 131)
양산 통도사 ‘십육나한도’ 중 제10존자, 1926년, 비단에 채색(출처: <韓國의 佛畵 2>(성보문화재연구원, 1996, p. 106)

대표적인 작품인 양산 통도사(通度寺) ‘십육나한도(十六羅漢圖)’는 1926년에 제작한 문고산 말년의 역작으로 근대적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나한도는 총 6폭으로 제작되었는데, 가지런히 앉은 나한들 주위의 배경이 독특하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근대기 새로 유입된 중국 청대 불교판화와 일본풍의 호랑이, 당대의 복식을 한 인물들, 민화와 신선문자도의 모티프 등 이전 불화들에서는 보기 힘든 다양한 요소들을 차용해 그렸다. 또한 배경의 산수는 전통적으로 그려지던 청록진채풍의 이상적인 산수가 아니라 실제 경치를 묘사하여 흥미로운데, 문고산의 근거지인 금강산의 실제 모습을 옮겨 그린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특히 제9존자를 단독으로 그린 폭에서는 금강산 구룡폭의 모습을 연한 황토색으로 대담하게 표현하였으며, 1919년에 김규진의 대형 글씨 ‘彌勒佛’을 암벽에 새겨 넣은 것까지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이는 문고산이 자신이 금강산 불모(佛母)라는 자부심과 함께 당시 금강산 철도 개통에 따른 금강산 관광 열풍을 반영한 것으로 보이며, 당시 간행된 금강산 관광엽서의 구도와 색감을 그대로 불화에 도입해 제작한 것이다.

또 그는 일찍부터 그가 제작한 불화에 서양화의 명암법을 적용하였다. 예를 들어 초기작인 1882년에 제작한 보현사 ‘십육나한도’에서부터 시작하여 꾸준하게 명암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쌍월당성활진영(雙月堂性闊眞影)’과 같은 불교초상화에서도 사실적 표현과 명암법으로 인해 마치 실제 인물을 대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현재 그의 작품은 80여 점이 알려져 있으며 50여 점 이상이 현전한다.

‘자화상’, 20세기 초, 비단에 담채, 28.2×32.5cm, 간송미술관 소장(출처: <澗松文華>, 한국민족미술연구소, 2009년, p. 87)

화승_ 김석옹 (金石翁, 1851~1917)

속성은 김 씨이고 당호는 석옹(石翁), 법명은 철유(喆侑)이다. 김석옹은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출생하여 1868년 안변 석왕사(釋王寺)에서 불적에 들었다. 그는 1875년경부터 본격적으로 불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1910년경까지 화승으로서 활동하였다. 김석옹은 화승으로서 뿐 아니라 석왕사의 재건에 힘쓰는 등 사판승(事判僧)으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하였는데, 그의 석왕사 재건과 관련된 열성적인 활동은 당시 신문에도 여러 차례 소개되었을 정도이다. 석왕사 및 안불사(安佛寺)의 주지를 지내기도 하였다.

김석옹은 불화 외에도 산수화와 초상화, 그리고 도석인물화에 능했다. 그는 자화상을 한 점 남기기도 했는데, 이는 근대기 불화승이 남긴 유일한 자화상일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분명한 자아관을 지니고 있었으며, 단순히 불화승으로서만이 아니라 근대적 예술가로서 자신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석옹은 문고산과 함께 신문지상에 1910년대 ‘조선 불화의 단 2인의 명인’으로 병칭되고 있어 당대 불화 제작자로서 상당히 유명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서울 성북구 미타사 ‘관음보살도’, 1906년, 비단에 채색, 91.5×131.2cm(출처: <韓國의 佛畵 34>(성보문화재연구원, 2005, p. 124)
서울 삼성암 ‘산신도’, 1908년, 면에 채색, 116.0×138.5cm(출처: <韓國의 佛畵 36>(성보문화재연구원, 2005, p. 117)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서울 성북구 미타사(彌陀寺) ‘관음보살도(觀音菩薩圖)’(1906)는 기존의 전통적인 관음보살도의 도상의 의존하지 않고 중국 청대 판화의 도상을 도입해 용왕의 모습을 무장한 장군형으로 그리는 등의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으며, 독특한 선재동자의 모습이나 분출하는 물줄기의 표현이 눈길을 끈다. 또 1908년에 제작한 서울 삼성암(三聖庵)의 ‘산신도(山神圖)’는 김석옹의 특징이 잘 나타난 수작이다. 나무 기둥이나 뒤편 폭포의 표현에서 서양화법을 감지할 수 있으며, 전체적인 색감의 조화, 산신의 인자한 표정과 안정감 있는 자세, 그리고 호랑이의 세밀한 표현 등에서 그의 솜씨가 잘 발휘된 산신도라고 할 수 있다.

김석옹은 화풍에 있어서는 기본적으로 전통을 바탕으로 세련되고 치밀한 표현기법을 고수하고 있으면서도 서양화의 명암표현을 적재적소에 사용하였다. 다름다리(불화의 기본 채색 과정 후 문양의 시문이나 명암표현, 배경 등의 마무리 작업)를 잘하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전하는데, 실제로 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끝마무리가 빈틈없고 정성을 다한 것이 느껴지는 수작들이어서 작품의 기복이 거의 없다. 김석옹은 당대 불화의 명인이라는 수식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우수한 실력을 가진 화승이었다.

화승_ 김보응 (金普應, 1867~1954)

속성은 경주 김 씨, 당호는 보응(普應)이며 법명은 문성(文性), 속명은 계창(桂昌)으로 스스로를 계룡산인(鷄龍山人)이라고 하였다. 그는 한때 청양 정혜사(定慧寺)의 주지를 맡기도 하였으며, 1949년에는 불교미술의 연구와 제작, 재료 알선, 그리고 불교서적의 간행 및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불교미술연구회(佛敎美術硏究會)를 창립하여 회장을 역임하였다.

김보응은 1882년경부터 1954년 입적하기까지 60여 년간 활발히 활동하며 130여 점의 불화를 제작하였는데,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화승 김금호(金錦湖)의 제자로 알려져 있으며, 문고산 등 근대기 유명 화승들과 함께 활동하기도 하며 영향을 주고받았다. 또 불화 외에도 불상의 제작과 개채 수리, 단청 등의 불사에도 참여하였다. 그가 제작한 불화들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서양화법의 사용으로, 명암법을 능숙하고 안정적으로 사용하여 사실적인 입체감을 구사하였다. 그래서인지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는 초상화, 즉 인물을 사진보다 더 사실적으로 그려 ‘인물의 달인’이라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불화의 밑그림에 있어서도 전통적 불화와 차별화되는 새로운 모티프를 새롭게 그려냈는데, 소설의 삽화나 새롭게 유입된 불교판화 혹은 근대기의 새로운 생활풍속과 문물을 불화 속에 담아내기도 하였다.

서울 흥천사 ‘감로왕도’, 1939년, 비단에 채색, 147.8×208.1cm
밀양 표충사 관음암 ‘천수천안관음보살도’, 1930년, 면에 채색, 251.5×283.0cm(출처: <보응당 문성 작품집>(성보문화재연구원,
2010, p. 189)

 그러한 김보응의 불화 중 대표적 작품으로 1939년에 제작한 서울 흥천사(興天寺) ‘감로왕도(甘露王圖)’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화면구성부터 독특한데, 기존의 감로왕도와는 달리 화면을 분할하여 분할된 화면에 각 장면을 그려 넣었다. 비행기나 탱크가 등장하는 전쟁장면, 일본 통감부와 남산의 신사(神社) 등 일제강점기의 시대적 상황들을 사실적으로 그렸으며, 이 밖에도 1939년 당시의 새로운 풍속과 풍물들, 즉 전화통화 장면과 자동차·전차·서커스·신식 재판과 모던걸·모던보이 등이 등장하여 눈길을 끈다. 이 작품은 근대기 시대 상황을 기록하듯 세세한 표현이 두드러지며, 서양화의 원근법과 명암법까지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근대기를 대표하는 불화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대표작으로 1930년에 제작한 밀양 표충사(表忠寺)의 ‘천수천안관음보살도’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규모면에서도 압도적이지만, 적절한 색의 운용과 서양화법, 깔끔한 마무리까지 김보응의 화풍을 잘 보여준다. 천수관음의 도상은 당대 새로 유입된 중국의 불교판화에 근거해 그려냈으며, 그 양쪽의 용왕과 선재동자는 중국소설 〈서유기(西遊記)〉의 삽화에서 차용하여 그렸다. 제자로는 안병문(安秉文)과 다음에 살펴볼 김일섭이 있다.

화승_ 김일섭 (金日燮, 1900~1975)

속성은 김 씨, 법호는 퇴운(退耘)이며 화호는 금용(金蓉), 법명은 일섭(日燮)이다. 그는 1913년 14살이 되던 해에 순천 송광사(松廣寺)로 출가하였고, 송광사 보명학교, 중등과 지방학림을 다니며 우수한 성적을 냈다. 김일섭은 현대까지 활동하며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기도 하였는데, 특히 1938년경부터 성예원(聖藝院)이라는 불교미술전문제작 및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운영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또한 개인의 작업일지 성격이 짙은 ‘년보(年譜)’를 꼼꼼히 기록해 언제 어떤 인연으로 어디서 누구와 함께 불화를 제작했는지 확인할 수 있으며, 남아있는 상당한 양의 그의 불화들과 대입시켜볼 수 있다. ‘년보’에 나타나는 그의 작품번호가 506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한 사찰에서 작업한 모든 불사를 한 건으로 기록하였으므로 실제 그가 제작한 작품의 점수는 이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이 기록 중에는 앞부분에 ‘불교예술운동’이라는 항목이 있어 김일섭의 불교예술에 대한 철학과 소신을 엿볼 수 있으며, 이 글은 불교예술의 제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교과서적 성격을 띠고 있다. 그는 불화를 주로 하면서도 조각, 공예, 단청 등 다양한 불사에 참여하였는데, 1935년에는 김제 금산사(金山寺) 미륵대불을 조성하는데 뒤에 살펴볼 조각가 김복진과 경쟁하여 출품하기도 하였다.

‘총본산 태고사 대웅전 후불도’, 1938년, 면에 채색(출처: <韓國의 佛畵 34>(성보문화재연구원, 2005, p. 37)

김일섭은 앞서 본 김보응의 제자로 알려진 만큼 서양화법의 구사가 매우 뛰어났으며, 밑그림에 있어서도 전통적 불화에 의존하지 않고 계속해서 새롭게 그려 내려는 의지를 보였다. 그의 불화들은 대체로 서양화의 명암법을 구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년보’에 10페이지에 걸쳐 그린 인체의 동작선묘는 베를린 올림픽 기록영화인 ‘올림피아’(1938년 종로에서 상영)를 보고 그린 것으로 그가 사실적인 표현과 서양화법의 구사를 위해 꾸준히 실력을 연마해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38년에 그가 제작한 총본산 조계사 대웅전의 후불도는 제작된 후 바로 잡지 〈불교(佛敎)〉에 사진으로 게재되어 그의 명성과 실력을 가늠케 한다.

‘치성광여래도’, 1925년, 면에 채색, 153.8×191.4cm, 순천 송 광사박물관 소장(출처: <마곡사 근대불화를 만나다>, 국립공주박물관,
2012년, p. 139)

그의 대표작으로 조계사 대웅전의 후불도 외에도 송광사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송광사 ‘치성광여래도(熾盛光如來圖)’(1925)를 들 수 있는데, ‘년보’를 통해 그가 밑그림과 마무리를 담당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서양화의 명암법도 눈길을 끌지만, 마치 예수와도 같이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치성광여래의 모습이나 권속들을 소설 〈삼국지(三國志)〉의 등장인물로 묘사한 점, 그리고 바이올린과 같은 서양악기를 연주하는 인물과 서양인의 머리모양을 한 인물 등 매우 독특한 표현들이 나타나고 있어 김일섭이 전통불화와 차별화되는 새로운 밑그림을 그려 내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다른 많은 그의 불화들에서도 보이는데, 개성적인 불화를 그려 내려 애썼던 근대적 화승의 면모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화맥을 이은 제자들은 현재 4대에 걸쳐 21개 문중으로 265명의 회원이 있다. 그를 기리기 위해 ‘불교미술 일섭문도회’가 만들어져 그 중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제자만도 15명이다.

화가_ 정종여 (鄭鍾汝, 1914~1984)

호는 청계(靑谿)이고 1914년 경남 거창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미술에 소질을 보였다. 그는 1928년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집안 형편으로 일을 하다가 일본으로 이주하여 공장 등을 전전하며 야간미술학교에서 인물초상화를 배웠으며, 1933년에는 오사카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미술수업을 받기 시작하였다. 재학시절에도 정종여는 교외의 깊은 산중에 위치한 고찰(古刹)에서 거주하며 작업하였다고 한다. 정종여는 ‘가야산 해인사’나 ‘석굴암의 아침’과 같이 불교와 관련이 있는 작품들을 다수 제작하였는데, 운보 김기창(雲甫 金基昶, 1913~2001)과 오사카미술학교 시절의 후배의 증언에 의하면 정종여는 어려서부터 해인사(海印寺)와 동화사(桐華寺) 등 사찰에서 거주하였다고 하며 일본 유학도 해인사 주지스님의 학비 지원으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정종여와 불교의 인연은 상당히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연유로 불교적 색채가 짙은 작품들은 물론 사찰의 불화도 제작하게 되었을 것이다.

진주 의곡사 ‘괘불도’, 1938년, 면에 채색, 6 52.0×335.0cm(출처: <韓國의 佛畵 5>(성보문화재연구원, 1997, p. 16)
진주 의곡사 ‘괘불도’, 1938년, 면에 채색, 6 52.0×335.0cm(출처: <韓國의 佛畵 5>(성보문화재연구원, 1997, p. 16)

정종여의 작품활동은 조선미전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출품작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며 언론에 의해 ‘천재화가’로 칭송되기도 하였다. 그가 제작한 대표적인 불교 관련 작품 중 현전하는 작품으로 1938년에 제작한 진주 의곡사(義谷寺) ‘괘불도(掛佛圖)’가 있다. 이 불화는 야외의식용 대형 불화로 현대적인 시각으로 보아도 대단히 획기적인 작품이다. 당시까지도 화승들이 전통적 방식으로 불화를 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이 괘불은 유학파 동양화가인 정종여에 의해 진채의 전통기법이 아닌 청신한 동양화의 담채 기법으로 그려진데다, 복잡한 권속들을 생략하고 청련화 위에 앉은 부처의 모습을 강조한 대담하고 인상적인 불화로 당대에도 매우 화제가 되었을 것이다. 진주 의곡사는 해인사의 말사로 불교적 인연으로 정종여가 제작에 착수하게 되었을 수도 있지만, 작품 하단에 기재된 화기(畵記)로 보건대, 제작 당시 증명(證明)과 회주(會主), 그리고 화주(化主)를 겸임해 맡았던 제봉 동률(濟峰 東律), 즉 후에 환속하여 서예가로 활동하는 청남 오제봉(菁南 吳濟峯, 1908~1991)과의 인연으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석굴암의 아침’(출처: 이구열 책임편집, <한국근대회화선집 별책 북으로 간 畵家들>, 금성출판사, 1990년, p. 70)

이 밖에도 현전하지는 않지만 흑백사진으로 남아 있는 ‘석굴암의 아침’은 정종여가 1940년에 제작하여 제19회 조선미전에 출품, 무감사 특선을 받아 호평 받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석굴암 본존을 측면에서 대각선 구도로 배치하여 뒤쪽의 감실로 이루어진 배경과 강약대비의 효과를 주었으며, 촛불로 밝혀진 본존의 모습과 그 뒤의 어두운 대비가 극적인 효과를 주며 수묵의 맛을 잘 살리고 있다.

청계 정종여는 기록과 작품을 통해 볼 때 일반적인 화목 외에도 특히 불교 소재의 다양한 작품과 불화를 제작한 독특한 이력의 작가이다. 월북작가로서 그의 작품활동의 성과와 의미들이 뒤늦게 조명된 감이 있지만 최근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세미나가 열리는 등 정종여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화가_ 박생광 (朴生光, 1904~1985)

호는 내고(乃古)이다. 그는 진주에서 태어나 진주농고를 다녔으며 17세에 일본 교토로 건너가 그림 수업을 받기 시작하여 교토회화전문학교를 수료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가 끝나는 즈음하여 한국에 왔으나 1977년에야 완전히 귀국하였다. 오랜 세월 일본에서 활동하며 조선미전, 명랑미술전, 신미술인협회전, 일본미술원전 등에 작품을 출품하며 진한 채색의 강렬하고 대담한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박생광의 작품들 중에는 ‘청담대종사’, ‘토함산 해돋이’, ‘혜초 스님’ 등 불교적 소재의 작품이 상당수 전하는데, 이러한 불교적 색채의 작품들을 제작한데는 어렸을 적부터 가졌던 불교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더불어 청담 이찬호(靑潭 李贊浩, 1902~1971), 즉 청담대종사와의 교유가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는 진주보통학교시절부터 청담 스님과는 친구로 지냈으며 이후에도 꾸준히 서로 교류하였다고 한다. 또 청담 스님과는 함께 호국사(護國寺)에 입산했다가 하산한 이력이 있을 정도로 특별한 사이였다.

‘청담대종사Ⅰ’, 1983년, 종이에 채색, 80.0×120.0cm(출처: 김이환, <수유리 가는 길>, 이영미술관, 2004년, p. 65)
토함산 해돋이’, 1984년 종이에 수묵채색, 136.0×139.0cm, 개인소장(출처: 朴廷 편저, <朴生光畵集>, 도서출판 등불, 1986년, p. 38)

작가노트에 따르면 박생광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강렬한 원색의 색채 역시 한국의 전통미술 가운데서 극채색을 지닌 분야를 찾다보니 사찰의 단청과 탱화의 기법을 택하게 된 것이라고 하고 있어, 그가 작품의 소재 뿐 아니라 기법적 측면에서도 불교 미술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을 알 수 있다. 박생광의 불교 관련 작품들 중 ‘청담대종사Ⅰ’과 같이 청담 스님을 그린 시리즈나 ‘토함산 해돋이’를 비롯한 작품들은 그에게 작품의 영감을 제공한 청담 스님과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석굴암의 조각들을 그만의 대담한 구도와 진채의 채색기법으로 그려낸 수작들이다.

조각가_ 김복진 (金復鎭, 1901~1940)

조각가 김복진의 호는 정관(井觀)이며, 일본의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에 귀국하여 타계한 해인 1940년까지 활동하였다. 그 사이 5년여의 옥중 생활을 제외하면 10년 정도의 길지 않은 기간에 조각가로서 큰 족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미술평론가, 문예운동가, 그리고 사회주의 조직운동가 등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김복진은 출옥 이후인 1935년부터 작고할 때까지 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여러 점의 불상을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불상을 제작하게 된 데에는 도쿄미술학교 재학시 불문(佛門)에 들어가 불자로서 생활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 도쿄미술학교 시절 지도교수였던 다카무라 고운(高村光雲, 1852~1934)의 목조불상 조각들도 일정 부분 김복진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복진은 1925년 귀국 직후 신문지상에 ‘경주 석굴암의 본존상’이라는 스케치를 게재하기도 하였으며, 평상시 고찰을 답사하며 제자들에게도 불상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옥중에서도 목조불상을 제작하거나 먹다 남은 밥을 이용하여 조각하기도 하였다는데, 실제로 그는 항상 품에 호신불로 관음보살상을 지니고 다닐 정도로 신심이 깊었다. 어린 딸을 잃은 말년에도 그는 딸의 49재를 챙기면서도 보은 법주사(法住寺)와 청주 용화사(龍華寺)의 대불 조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보은 법주사 ‘미륵대불’, 시멘트, 1939-1963년(출처: <김복진 힘의 미학>, 도서출판 재원, 1995년 p. 123)

그가 제작한 불상 중 법주사의 ‘미륵대불(彌勒大佛)’(1940)은 완성을 2개월가량 앞두고 김복진이 타계하여 그 제자들이 1960년대 최종 완성한 작품이다. 이 미륵불은 시멘트라는 근대기 새로운 재료를 사용해 최신 공법으로 조성한 것으로 크기가 무려 33미터에 이르는 대작이었다. 이 작품은 새로운 재료와 대작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도 주목할 만하지만, 전문 조각승이 아닌 서구 조각을 배우고 돌아온 유학파 조각가에 의해 제작된 예배용 불상이라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하며 제작 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 신라불상을 원형으로 하고 대작임에도 당당하고 안정감 있는 비례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김제 금산사 미륵전 ‘본존불’

이 외에도 금산사 미륵전의 본존상 역시 김복진이 1936년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본존상은 공모입찰이라는 특이한 방식으로 제작자를 결정하였는데, 이 때 근대기 유명 화승인 김보응과 김일섭 등도 함께 응모하였으나 김복진이 최종적으로 선정되었다. 무려 11.82미터의 불상은 270일에 걸쳐 완성한 소조불로 역시 전체적인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김복진의 대표작이다.

조각가_ 권진규 (權鎭圭, 1922~1973)

조각가 권진규는 함흥의 부유한 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일본 유학은 20세가 되던 1942년 이루어졌고, 22세 때 징용을 피해 잠시 귀국했다가 25세가 되는 1947년 다시 일본으로 가 이듬해인 1948년 도쿄의 무사시노 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 부르델의 제자였던 시미즈 다카시(淸水多嘉示)로부터 조각을 배웠다. 그는 재학시절부터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아 일본의 공모전에서 특선을 수상하며 주목받았으며, 일본 체류 13년 만에 귀국하여 활동하였으나 국내에서의 반응은 그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비구니’, 1960년대 후반, 테라코타, 48.0×37.0×20.0cm, 개인소장(출처: <한국의 미술가 권진규>, 삼성문화재단, 1997년, p. 133)

권진규는 성격이 과묵하고 사교적이지 못했는데, 불교와는 깊은 인연을 맺어 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하고 신변을 정리하던 시기에도 경상도의 절에서 머무르며 교유하던 스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또 권옥연 씨의 다음과 같은 증언은 불교적 인물상을 제작할 당시 불교에 의탁하고자 했던 그의 심경을 잘 대변해 준다. “진규 아저씨가 한창 비구니나 탁발승을 제작할 때입니다. 그때 그는 저한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중이 되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고 실제로 그 뒤에 절에 들어갔다 나왔지요. 이 무렵 저하고 불상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空間〉5·6합호, 1973, p. 6) 또 권진규는 김복진이 미완성으로 남겨둔 법주사 ‘미륵대불’의 약 6개월간의 마무리 작업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불상’, 1970년대, 테라코타에 채색, 3 6.0×29.0×15.0cm, 개인소장(출처: <한국의 미술가 권진규>, 삼성문화재단, 1997년, p. 52)

권진규의 테라코타와 브론즈 작품 중 ‘춘엽비구니’나 ‘비구니’와 같은 인물상은 그 어떤 불필요한 요소도 제거하고 삭발한 머리와, 볼륨을 의도적으로 제거한 어깨, 그리고 그 어께에 걸친 단순한 승복 등 대담하게 본질만을 형상화한 종교성 짙은 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그의 작품 중 유달리 경건하고 엄숙한 표정의 비구니상들이 많았던 것을 그 자신의 구원을 위한 초월적 세계의 구현으로 보기도 한다.

최엽

동국대 강사. 이화여대 미술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동국대 미술사학과(불교회화사 전공)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화여대 박물관, 화정박물관, 동국대 박물관에서 근무한 바 있다. 현재 한국외대·가천대 등에서 미술사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