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에 깃든 불심(268호)

종교는 전래 과정에서 반드시 지역사회 문화에 적응해야 발전하게 되는데 그 지역의 토착 종교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불교의 상징성이나 불법수호신으로 인도에서는 코끼리 · 사자, 동남아에서는 뱀(코브라), 중국에서는 용, 한국에서는 호랑이가 불법수호신으로 등장한다. 한반도에서 귀신보다 더 무서운 존재는 호랑이다. 어느 때부터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건국신화에서부터 시작되는 호랑이가 대승적 차원에서 불법수호신으로 등장하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 후기 불교가 재부흥하는 과정에서 호랑이 가운데서도 백호는 산신신앙과 함께 신격화 되었다.

백호는 실존하지 않는, 유전성 돌연변이종으로 종교적 의미가 부여되는 곳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신성시되고 상징적이며 권위적인 존재로 우리 문화 속에 각인되어 있다. 실제 불가에서는 흰 코끼리, 흰 소, 흰 사슴이 성스러운 존재로 각인되어 있다. 그 기원은 중국의 오행사상에서 나타나는 형이상학적인 공상인데, 이후 민간신앙으로 변모 · 발전되었다. 그런데 우리 문화 속 백호는 고분벽화 속의 청룡과 같은 형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호랑이 그림은 사찰벽화 뿐 아니라 산신도 · 나한도 · 사왕도 · 감로탱화 등 다양한 곳에 다양한 형태로 등장된다. 특히 조선시대 후기 18~19세기 민중문화의 꽃인 민화 속 호랑이가 채색이나 형태가 다양해지면서 불가 속 호랑이도 다양하게 변모되어가는 현상을 볼 수 있다. 광대하고 원만한 불교의 포용력은 백수의 왕인 호랑이에게 자비를 베풀어 자유자재로 부리고 기도하며, 때론 불법수호신으로써 우리 정서 속에서 한국적 불교미술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으로 꽃피우게 되었다고 보여진다.

선암사 장경각 까치호랑이 벽화
불가의 진리인 경전들이 쌓여 있는 장소를 지키는 까치호랑이 가운데 필력과 채색이 잘 남아 있는 수작이다. 부처님의 법문을 청취하려는 듯 앞발을 한데 모아 포개고 앞을 응시하는 점잖은 자세로 입을 살짝 벌려 호랑이다운 위엄을 드러내고 있다.

봉원사 대웅전 포벽 호랑이
큰 건물의 일정한 포벽 공간에는 대부분 꽃이나 나한을 배치하는데 눈에 잘 띄지 않은 구석에 단청 장인의 별난 솜씨로 그려 놓은 백호다. 급작스레 크게 놀란 고양이가 몸을 웅크려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겁먹은 듯 귀여운 점박이 새끼호랑이다.

호랑이 수레 탄 산신령
흰 수염 신선형 산신령이 금빛 여의를 들고 커다란 병풍 앞에 네 바퀴 달린 마차형 수레에 앉아 있다. 깃발을 들은 동자와 수레 행렬을 수행하는 10명의 동자들이 분주하다. 수레보다 더 큰 황금 눈빛의 호랑이 등에 매듭으로 수레를 연결하여 기상천외한 상상력, 신령스러움의 극치를 읽을 수 있는 산신도이다. 여러 번의 복사 필름으로 화기 판독이 어려우나, 함풍(咸豊) 연간인 1800년대 후반작으로 보이고, 지리산 주변산신도 계통에서 여러 명의 동자가 등장되는 유형임을 알 수 있다. 화제에서도 ‘나무산왕대왕지위’ 가운데 ‘대왕자’는 ‘산왕’을 강조하였으며, 불문에 귀의한 호랑이의 역할을 읽을 수 있다.

선운사 영산전 호접도
고양이와 호랑이는 같은 종으로 혼돈하기 쉽다. 마치 검은 고양이가 나비를 쫓는 것처럼 보이는 나비를 쳐다보는 호랑이 그림이다. 법당 내부 측면의 벽사적 의미와 장식을 위한 고양이 같은 호랑이다. 무서운 호랑이보다는 별난 호랑이 그림을 유난히 좋아하는 우리 문화가 조선후기에 있었다.

봉선사 삼성각 백호
광릉 내 봉선사 삼성각 처마 안쪽에 구름다리를 타고 허공을 나르는 유난히 몸뚱이가 기다란 백호 한 마리가 화염문을 내뿜으며 힘차게 달려가고 있다. 백호는 긴 꼬리에 검은 줄무늬가 선명하고, 작은 날개가 양 앞다리 쪽에 달려 있으며, 머리가 작아 강력하고 날렵함이 돋보인다.

금강산 금강경 감응호
우렁찬 폭포소리 나는 언덕에 합장한 스님이 〈금강경〉을 크게 외우고 있을 그 앞에 경소리가 끝나면 잡아먹으려는 호랑이가 쪼그리고 앉아 기다린다. 스님의 너무나도 긴 지극정성이 담긴 염불소리에 감응을 받아 호랑이도 그만 불제자가 됐다. 호랑이 표정이 더 없이 편안해 보인다.

범어사 대웅전 백호도
구부러진 노송을 배경으로 크고 점잖은 백호 한 마리가 S자 긴 꼬리로 위용을 과시하며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다. 법당 출입문 윗벽에서 두 눈을 똑바로 뚫고 정면을 응시하는 얼굴로 삿된 생각을 모두 버리고 부처님 전으로 가시라는 경고를 날리고 있다. 맹호도의 자세보다는 벽사적 성격을 띤 부적 같은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조선시대 후기 전형적인 한국 호랑이, 인자한 백호의 모습이다.

쌍계사 명부전 까치호랑이
대웅전 인방 윗벽에 그려진 적호. 한정된 공간에 몸통과 긴 꼬리를 물음표처럼 멋지게 구부려 그려 넣은 조선시대 후기 민화다. 당시 유행한 전형적 까치호랑이 그림이다. 파란 눈, 작은 귀, 입을 약간만 벌린 동그란 얼굴은 고개를 돌려 나뭇가지에 앉은 작은 까치를 향하고 있다. 몸을 휘감아 호랑이를 향한 까치의 놀림에 어리둥절한 해학적 표현이다.

용연사 극락전 창방 비호도
우리네 문화 속 가장 빠르고 가장 무서운 것은 호랑이다. 이 산 저 산 산등성이를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다니는 호랑이를 ‘비호’라고 불렀다. ‘빠르다’는 최고의 표현력을 몸뚱이보다 더 큰 날개 달린 박쥐처럼, 네 발을 쩍 벌리고 창공을 날아다니는 모습은 대단한 상상력이다.

해남 대흥사 침계루 벌 받는 호랑이
대흥사 대웅보전 경내를 통과하려면 침계루를 거쳐야 한다. 침계루 정문 내목도리 벽에는 호랑이 한 마리가 네 발이 묶인 채 소나무에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려 무척 괴로운 표정을 하고 있다. 호랑이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불법수호신으로도 인도의 사자, 중국의 용, 동남아의 뱀과 함께 우리 문화 정서에서는 호랑이다. 무량무변한 불(佛)세계에서 호랑이 벌주기란 중생교화용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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