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 나는 국토순례(268호)

우리나라에는 ‘고성’이라는 지명을 가진 지역이 두 곳 있다. 강원도 고성(高城)과 경남 고성(固城)이다. 강원도 고성이 금강산을 품고 있다면, 경남 고성은 절경의 남해 바다에 안겨 있다. 경남 고성은 선사시대와 중생대 백악기(1억 3,500만 년 ~ 6,500만 년 전) 시대에 공룡들이 뛰어놀았던 흔적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세계 3대 공룡발자국 화석지 중 하나다. 공룡이 사라진 뒤 이곳은 사람들의 삶터가 되었고, 불교와 유교와 민속이 한데 어우러져 찬란한 전통문화의 꽃을 피웠다. 오래된 한옥처럼 낯선 이들에게도 편안함을 주는 그 곳, 고성으로 국토순례를 떠난다.

비 내리는 날 문수암에서 바라 본 남해바다는 물안개로 가득하다. 맑은 날의 남해바다는 마치 하늘과 같고, 작은 섬들은 구름마냥 바다를 둥둥 떠다니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앞산 오른쪽에 보이는 사찰은 보현암이다.

경남 고성은 서울에서 360km가 넘는 그야말로 천릿길이다.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단축됐다고는 하지만, 4시간 이상 달려야 다다를 수 있는 장도(長途)이다. 온화한 기후에 푸른 물결 일렁이는 남해바다와 산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어우러져 예로부터 살기 좋은 고장으로 정평이 났다. 특히 요즘은 선사시대부터 이어져 온 1억만 년 전 공룡의 역사와 민족의 유적을 전하는 청동기문화의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소을비포 성지는 낮은 야산에 해안 경사를 따라 쌓은 성으로, 고성을 방어하는 전략 요충지였다.현재는 인근의 어촌체험마을과 함께 별자리를 관측하는 명소가 됐다.

원시시대 공룡들의 삶터

불교와 유교, 민속문화가 어우러진 ‘선비가 사는 조용한 시골’이던 고성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발길이 잦아지게 된 건 수억 년 전에 살았던 ‘공룡’ 덕분이다. 티라노사우르스 같은 거대한 육식공룡과 초식공룡들이 남긴 수천 개의 발자국은 고성을 ‘공룡 나라’로 만든 일등공신이 됐다.

고성의 여러 공룡발자국 화석지 중에서도 가장 이름난 지역은 하이면(下二面) 덕명리(德明里)에 있는 상족암(床足岩)이다. ‘상족암’이라는 이름은 바위 모양이 밥상의 다리와 같다고 해서 ‘상족’, ‘쌍족’, ‘쌍발’로 불린데서 연유한다. 상족암 해변은 지금은 바다로 변했지만, 공룡들이 살던 당시에는 호숫가 늪지대였다고 한다.

덕명리 해안에는 네 발로 걷는 공룡(용각류)의 둥근 발자국, 두 발로 걷는 공룡(조각류 · 수각류)의 발자국이 3,000개가 넘는다. 상족암군립공원 주차장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해안가를 따라 조성된 나무데크 길이 나타난다. 이 길을 따라 걸으면 발 아래로 넓은 바위와 바다가 펼쳐져 있다. 바위 위에는 둥근 모양, 삼각형 모양의 홈이 파져 있는데, 공룡이 남긴 발자국들이다. 나무데크 길 중간에 설치된 계단으로 내려가면 바위 곳곳에 선명하게 찍혀 있는 공룡발자국을 볼 수 있다.

천년 고찰인 계승사 대웅전 뒤편에는 백악기의 거대한 공룡 발자국이 남아 있다.

나무데크 길은 상족암 동굴입구까지 연결돼 있다. 동굴 안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석불 모양의 바위, 베틀 모양의 바위 등이 있고, 암반에는 공룡 발자국들이 남아 있다. 동굴은 개방하고 있지만, 상황에 따라 출입을 통제하기도 한다. 특히 상족암 동굴은 은하수를 관찰할 수 있는 장소로 알려져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취재 당시에는 낙석 위험 때문에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서 들어가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다.

나무데크 길에서 반대편을 바라보면 바다 한가운데 우뚝 솟아오른 듯 보이는 절벽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주상절리(柱狀節理)로 이루어진 병풍바위다. 폭풍우가 몰아쳐도 버티고 서서 막아줄 것 같은 기세를 뿜어낸다. 병풍바위 위의 전망대에 올라서서 상족암과 짙푸른 남해바다를 바라보면 답답한 가슴이 시원해질 정도로 풍광이 좋다.

계승사 일대는 약 1억 년 전 중생대 백악기에 호수였는데, 퇴적암에 화성암이 뚫고 들어가 검은색의 퇴적암으로 변했다.

상족암 주변 이외에도 자연이 빚어낸 태고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곳이 있다. 금태산(金太山) 기슭의 계승사(桂承寺)다. 천년 고찰인 계승사에는 초대형 공룡발자국과 거대 암반 위에 파도가 밀려가면서 모래사장에 만들어 낸 듯한 물결무늬 화석, 계승사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거북등 모양의 기암괴석, 빗방울 화석 등을 볼 수 있다. 아울러 고성에는 청동기시대의 남긴 학림리지석묘(鶴林里支石墓), 석지리지석묘(石芝里支石墓), 오방리지석묘(梧芳里支石墓) 등이 있어예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고장이었음을 일러준다.

덕명리 해안의 바위에는 각종 공룡의 발자국이 곳곳에 남아 이곳이 공룡들의 서식지였음을 알려준다. 바다 건너에 주상절리로 이루어진 병풍바위가 절경을 자랑한다.

불법, 태초의 땅에 뿌리 내리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고성은 신라의 의상대사가 창건한 옥천사(玉泉寺)  · 문수암(文殊庵)  · 운흥사(雲興寺) 등 천년 고찰이 여럿 있을 정도로 불연(佛緣)이 깊고, 부처님의 법향이 안개처럼 피어오른 고을이다.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 연화산 톨게이트에서 가까운 곳에 옥천사가 있다. 연화산 옥천사 일원은 경상남도기념물 제140호로 지정됐을 만큼 울창한 숲과 계곡의 경관이 빼어나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옥천사를 대표하는 건물은 대웅전과 자방루(滋芳樓)다. 누각인 자방루 기둥에 온몸을 맡긴 채 기대고 앉아 나무 창 밖에 보이는 앞마당과 연화산의 풍경을 감상하노라면 시간 가는 걸 잊을 정도다. 맑은 날 연화산의 풍경도 좋지만, 비 내리는 날 연화산 산등성이를 춤추듯 흘러 다니는 물안개는 마치 무릉도원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한가롭다. 복잡한 세간을 떠나 여유로운 산사, 즉 자연 속에서 자연과 대화를 나누는 일, 그것이 곧 불법이요, 수행이 아니겠는가.

의상대사가 창건한 연화산 옥천사 전경.
옥천사 자방루 전경. 조선 영조 때 건립된 옥천사의 누각이다.
옥천사 자방루 기둥에 있는 용두. 누각을 끌고 피안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듯 환희심 가득한 표정이 인상적이다.

옥천사에는 자방루를 비롯해 많은 성보문화재가 있는데, 도난당한 문화재도 꽤 있다. 1976년 도난됐다가 프랑스에서 발견된 ‘지장보살도 및 시왕도[第二初江大王圖]’가 2016년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경사를 맞기도 했다.

고성 사람들뿐만 아니라 타지역의 불자들의 참배가 끊이지 않는 곳이 무이산(武夷山) 자락에 위치한 문수암이다. 무이산은 삼국시대부터 화랑들의 수련장으로 알려져 있을 만큼 우리나라 명승지 중의 한 곳이다. 문수암은 의상대사가 꿈을 꾸고 찾아간 그곳에 문수보살상이 나타나 있어 사찰을 창건했다고 전한다. 법당 안에는 문수동자상이 모셔져 있고, 법당 뒤편 바위 중간에는 굴이 있다.

문수암에서 바라보는 남해바다의 풍광은 탄성을 자아내게 할 정도로 절경이다. 짙푸른 바다는 하늘빛과 닮았고, 바다 곳곳에 솟은 섬들은 마치 푸른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인 양 보이는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의상대사의 뛰어난 혜안으로 창건한 사찰 덕을 후학들이 톡톡히 보고 있으니 큰 복이 아닐 수 없다.

자방루에 앉아 바라보는 창밖 풍경은 마음에 여유를 가져다 주기에 충분하다.
와룡산 운흥사의 주불전인 대웅전.

고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불교유적이 운흥사(雲興寺)다. 와룡산 운흥사는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 6,000명과 함께 왜군에 맞서 싸운 도량이다.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의 전투에 앞서 작전을 세우기 위해 세 번이나 방문했다고 전하는 호국 성지 중 한 곳이다.

운흥사 성보문화재 중 가장 이름난 유물은 보물 제1317호 괘불과 괘불함이다. 운흥사 괘불은 1730년 의겸(義謙) 스님 등 20명이 그린 대형불화로, 가로 768㎝, 세로 1,136㎝에 이른다. 괘불 뒷면에는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진언(眞言), 영조의 어인(御印)이 새겨져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세 번이나 반출하려 했으나 심한 풍랑 때문에 실패했다고 전한다.

이 사찰들 이외에도 고성에는 불교유적과 유물들이 다수 남아 있다. 대가면(大可面) 양화리(楊化里) 소재 절터에는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07호인 ‘고성 양화리 법천사지 부도군(法泉寺址 浮屠群)’이 있다. 마을길을 통과해 올라가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는 듯 보이지만 막다른 곳에 이르면 여러 개의 부도가 눈에 들어오고, 부도 뒤로는 산자락이 펼쳐져 있다. 이 절터에는 ‘계봉화상부도비(鷄峯和尙浮屠碑)’가 세워져 있고, ‘조웅대사(祖雄大師)’ 등 총 7기의 부도가 있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뜸한 것 같아 적막감이 감돌았다.

또 양화리 대무량사에는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21호 석조여래좌상이 불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의 석불로, 원래는 고성읍 우산리 우방사지(牛房寺址)에 있었는데, 1964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다고 한다. 광배는 우방사지에 남아 있었지만, 현재는 도난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상은 옮기고 광배는 왜 그 자리에 두었을까. 불상만큼의 ‘가치가 없어서’였을까, 옮기기 번거로워서였을까. 영문은 알 수 없지만 참담한 심정이다. ‘불교의 문화유산을 불교인들조차 외면한다면 불교문화유산을 누가 지켜줄 것인가?’하는 생각에 씁쓸함마저 느껴졌다.

고성은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승병을 이끌고 왜적에 맞서 싸운 운흥사와 함께 호국 성지가 여러 곳 있다. 이순신 장군이 선조 25년(1592년)과 27년(1594년) 두 차례에 걸쳐 왜선 57척 전멸시킨 전승지인 당항포(當項浦), 적을 막기 위해 소을비포(所乙非浦)에 쌓은 성지(城址)가 대표적이다. 경상남도기념물 제139호인 소을비포 성지는 낮은 야산에 해안 경사를 따라 자연석으로 둥근 형태로 쌓은 성이다. 2,200여 평의 성터에 남아있는 성벽의 높이는 3.2m, 길이는 5m 정도이지만,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언덕 위 성터로 200m 길이의 주춧돌이 길게 이어져, 인근의 어촌체험마을과 함께 은하수와 별을 관측하는 명소가 됐다.

고성은 민속탈춤인 ‘고성 오광대(五廣大) 놀이’가 유명한 곳이다. 오광대놀이는 불교와 무관하지 않은 민속놀이다. 1910년 무렵 경남 통영의 미륵산 용화사 뒤에서 통영 오광대가 연희됐는데, 이를 본 고성 사람들이 자신들도 해보자는 의견을 나눴다고 한다. 당시 고성에 돌림병이 돌자 사람들이 문수암으로 피신을 했는데, 그곳에서 고성 오광대의 싹이 움텄다고 하니, 불교가 있었기에 고성의 민속이 빛을 발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불교는 고성에 터를 잡고 사는 이들의 정서에 뿌리내린 종교요, 전통문화의 큰 기둥이다.

문수암 대웅전에는 문수동자상이 있고, 건물 밖 뒤쪽으로 굴이 하나 있다.
문수암 법당 뒤편으로 우뚝 솟은 바위와 소나무가 산사의 풍광을 더해준다.

1398년(조선 태조 7)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하고 지방의 중등교육 및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설립한 고성향교와 전주 최씨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 집성촌인 학동마을이 있는 전통이 살아 숨 쉬는 고성. 특히 학동마을은 옛 담장이 아름답기로 이름나 있다. 마을 입구에 주차를 하고 걸어서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면 한옥과 어우러진 담장이 정겹고, 고풍스러우며 멋스럽다는 느낌이 절로 든다. 서양의 오래된 건축만 고풍스러운 건 아니다. 우리네 선조들이 정성스레 황토와 돌로 한 칸, 한 칸 쌓아올린 돌담과 그 돌담을 타고 내린 풀과 꽃들은 한국인들의 정서에 깊이 뿌리 내려져 있는 고향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뿐만 아니라 한국미를 대표하는 소박한 아름다움의 표상이다.

돌담 속에 우뚝 솟아 기와를 머리에 이고 있는 아담한 한옥은 한국인의 정신이 깃든 건물이고,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한국의 전통을 후세에 전해주는 가교 역할을 하는 문화지킴이들이다. 오래된 한옥의 서까래와 하얀 회(灰)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소박한 아름다움은 서양의 그 어떤 건축물과도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답고 훌륭하다. 그리고 고성군 상리면(上里面) 척번정리(滌煩亭里)에 조성된 ‘상리 연꽃공원’과 공원 앞 100년 된 한옥은 겉으론 투박하지만, 그 속에는 정겨움이 넘쳐나는 마루가 이방인들에게도 편안함을 내어준다. 그것이 바로 한국적인 정다움과 아름다움의 미덕이 아닐까.

한국미가 살아서 호흡하는 아름다운, 최고의 솜씨를 자랑하는 화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 그려놓은 한 폭의 진경산수화 같은 그 곳, 경남 고성이다.

8월 말 상리 연꽃공원에 수련들이 얼굴을 내밀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처염상정’을 느끼게 한다.
양화리에 있는 법천사지 부도군에는 부도비와 총 7의 부도가 남아 이곳에 절이 있었음을 일러준다.
황토와 돌로 한 칸 한 칸 쌓아올린 학동마을의 멋스러운 옛 담장은 한국미를 대표하는 소박한 아름다움의 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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