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가 불교를 신앙할 때 유럽은 불교를 연구했다.

지난해 8월 마지막 날. 경주의 이른 새벽 공기는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나선 내게 꽤나 서늘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한국시간으로 그날 밤쯤 인도에 도착하면 이 새벽의 상쾌함이 그리워질 거라는 동료의 말에 옷 걱정은 접어두었다. 경주에서 인천공항까지 짧지 않은 거리였지만 워낙 일찍 일어난 탓에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보니 버스는 어느덧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짐을 부치고 인천 발 뉴델리 행 비행기 티켓을 손에 쥐었지만, 여전히 인도에 간다는 게 실감나지 않았다. 인도불교를 전공한 후, 그에 대한 짧은 지식으로 밥 먹고 살아가고 있지만 인도를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기에 인도 여행은 늘 마음속에 미뤄 놓은 숙제와도 같았다.

늦은 나이에 금강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려고 할 때 초기불교, 한국불교, 인도-티베트 불교, 중국불교 등 여러 불교학 전공 중에서 내가 선택한 것은 ‘인도-티베트 불교’였다. 그리고 그 전공을 배우러 간 곳은 그렇다고 중국도, 인도도, 티베트도 아닌 일본의 동경대학 인도철학-불교학과[印度哲学仏教学研究室]였다.

불자들이 부처님의 나라로 기억하는 인도는 다양한 색깔을 가졌다. 인도를 상징하는 코끼리와 향신료,건축물.

당시 불교를 공부하러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보여주곤 했다. 흔하지 않는 불교학을 전공한다는 것도 의외였겠지만, 그런 불교를 공부하러 인도나 중국이 아니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는 게 또 웬 말인가 하고. 그만큼 우리에게 불교와 불교학은 오해와 편견 속에서 어색한 동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해진 삼국시대 이래 천오백년이 넘는 시간동안 불교가 종교를 넘어 하나의 삶으로, 역사로, 문화로 자리하고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불교가 전해진 아시아국가에서 불교는 거의 이런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학은 근세기 유럽 열강(列強)들이 인도 등 아시아를 지배하면서 그 지역의 역사 · 문화 · 종교 등을 이해할 필요성에 의해 발생된 학문이었다. 그래서 학문으로서의 불교학의 근간을 만든 학자들은 불교를 종교로 가진 아시아 여러 나라의 학자들이 아니라, 일반적 생각과는 달리 당시 유럽의 강자였던 영국 · 독일 · 오스트리아 · 프랑스 · 벨기에 등에서 배출된 학자들이었다.

그래서 당시 유럽 유수의 대학들은 인도 철학-불교학과를 설치해 아시아인이 종교로서 신앙해 오던 불교와는 전혀 다른 문헌학적 방법에 따라 불교를 연구하기 시작하여 불교 경전, 불교 사상에 대한 여러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기에 이르렀다. 한 예로 인도 대승 불교 사상을 논할 때 ‘불교 논리학’이라는 매우 중요한 분야가 있는데 이 분야에 관해서는 오스트리아 빈 대학이 세계에서 가장 권위가 있을 정도로 불교학은 유럽이 고향이다.

한편 일본은 잘 알려진 대로 19세기 중반 단행한 명치유신(明治惟新)을 통해 근대화, 서구화에 성공하게 된다. 그때 명치 정부는 많은 유학생들을 서양으로 보내 서구의 학문을 배워오게 했는데, 아이러니하게 불교학도 당시 서구에서 수입된 신식 학문 중 하나였다. 원래 일본도 우리처럼 오랜 기간 불교를 종교로 신앙하고 있었기에 그러한 전통을 바탕으로 서구적 학문체계로서의 불교학을 유럽에서 역수입해 와서 전통과 접목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유럽의 불교학을 배우고 돌아온 일본의 불교학자들은 아시아 최초로 근대적 의미의 불교학자가 되어 대학 내에서 불교학을 연구할 수 있도록 그 초석을 다졌다.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일본 최초의 국립대학인 동경대학에서는 1904년 철학과 전공과목 중 하나로 인도철학 과목을 개설했다. 그리고 1916년 ‘인도 철학 강좌’의 모습으로 현재 동경대학 내 ‘인도철학 · 인도문학 · 불교학’ 연구과정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여기서 배출된 불교학자들은 이후 일본 내 여러 대학에 불교학 관련학과를 만들어 후학 양성에 힘썼고, 현재 일본은 백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인도 철학 및 불교학 분야에서 가장 방대한 연구 성과를 축적한 대표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일단 이것이 내가 인도불교를 전공하면서도 그동안 인도에 가지 않았던 ‘이유 있는 변명’이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모르는 주위 지인들은 인도에 가 본적 없는 나를 늘 ‘짝퉁 인도 불교학도’라고 놀리곤 하였다.

그렇게 인도와 인연이 없던 내가 뒤늦게 인도행 비행기에 오르게 되었으니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 첫 인도행의 목적지는 소위 말하는 부처님 4대 성지순례도, 그렇다고 엘로라 · 아잔타 석굴 등 유명한 문화재 탐방도 아니었다. 나의 인도행은 내가 속한 대학 연구소의 업무 때문이었기에 첫 인도 방문에서 내게 허락된 공간은 인도 서북부의 궁핍한 산골 다람살라였다. 그렇다보니 이번 여행으로도 인도를 다녀왔다고 말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할 수 있을 듯하다.

인도 북부 최대 도시인 델리의 번화가 모습. 뉴델리를 포함한 델리 수도권에는 약 2,500만 명이 살고 있다.

하지만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다람살라에서는 해마다 티베트 불교의 정신적 지도자인 제14대 달라이라마 존자가 아시아인들을 위한 법회를 열어준다. 종교를 떠나 전 세계인들의 존경을 받는 불교 수행자의 법회를 들으러 가는 길이니 비록 유명한 유적지를 가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으리라.

이런저런 감상과 밀려오는 졸음에 지쳐있는 동안 인천을 떠난 지 8시간 만에 비행기는 인도 델리공항에 도착했다. 인류 4대 고대 문명의 하나를 꽃 피운 나라 인도. 일반 불자들에게 불교는 소원을 들어주는 기복종교로서의 색채가 강하지만 사실 불교(佛敎), 즉 부처님의 가르침은 고도로 발달된 이러한 지적 토양 위에서 탄생하였다.

인간은 타오르는 욕망 때문에 남과 스스로를 괴롭혔다. 하지만 그렇게 영원할 것 같았던 삶에서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사라져가야만 했다. 그런데 삶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자신이 행한 행위로 또다시 몸을 바꾸어 태어난다. 그리고 욕망 때문에 남과 스스로를 괴롭히고 그러다 다시 죽어가고,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생로병사의 돌고 도는 수레바퀴 속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에 대해 매우 실천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그 위대한 스승께서 태어나셨던 곳이 바로 인도다. 부처님을 모시던 아난존자, 〈반야경〉을 수놓았던 사리불, 고행 중이시던 부처님께 우유죽을 공양 올리던 수자타, 부처님을 시기 질투하던 데바닷타가 살던 그 인도에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나는 인도에서의 첫날을 피곤하다는 이유로 잠으로만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최종 목적지 다람살라는 이곳 델리에서 하루를 머문 뒤 다음날 비행기로 가야 했다. 그래서 피곤하긴 했지만 저녁을 먹고 호텔에서 택시를 불러 델리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이미 어둠에 묻힌 델리 시내를 택시 안에서 얼마나 느낄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불교학을 공부하며 늘 어려운 불교 경전 속에서만 보던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 글자가 거리곳곳에 써져 있는 걸 보며, 이곳이 인도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아직 최종 목적지 다람살라에 도착하지는 못했지만 내 생애 첫 인도 여행의 첫 날밤은 그렇게 내 안에 새겨지고 있었다.

정상교

현재 금강대학교 불교문화학부 교수. 천태종립 금강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 후 일본 동경대학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 동국대학교(경주) 티벳대장경역경원 전임연구원을 역임했다. 저서로 〈도쿄대학 불교학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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