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후반 출가한 수행자의 고뇌와 치열한 구도일기

<삽화=배종훈>

만약 이 책을 젊은 날에 읽을 수 있었다면 나는 출가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그 정도로 신심을 유발하고, 출가의 충동마저 불러일으킨다. 아마 여러분도 이 책을 읽고 나면 나의 이런 말에 공감할 것이다. 이 책은 일기 형식을 빌린 수기이다. 간혹 심오한 이야기가 인내심을 요구할 때도 있지만, 50여 년 전 수도자의 길을 궁금해 하는 독자에게는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주류 종교를 말하자면 불교  ·  천주교  ·  개신교일 것이다. 어떤 불교인을 만났을 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줬다. 3대 종교 성만약 이 책을 젊은 날에 읽을 수 있었다면 나는 출가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그 정도로 신심을 유발하고, 출가의 충동마저 불러일으킨다. 아마 여러분도 이 책을 읽고 나면 나의 이런 말에 공감할 것이다. 이 책은 일기 형식을 빌린 수기이다. 간혹 심오한 이야기가 인내심을 요구할 때도 있지만, 50여 년 전 수도자의 길을 궁금해 하는 독자에게는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주류 종교를 말하자면 불교  ·  천주교  ·  개신교일 것이다. 어떤 불교인을 만났을 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줬다. 3대 종교 성직자에 대한 비교가 주제다. 불교의 스님과 천주교의 신부님과 개신교의 목사님 중에 누가 더 훌륭할까? 그는 각 종교의 금기사항을 비교해서 말했다. 술과 담배   ·   고기   ·   결혼 가운데 신부님은 ‘술과 담배’와 ‘고기’가 허용되지만, ‘결혼’은 안 된다. 목사님은 ‘고기’와 ‘결혼’은 허용돼 있지만, ‘술과 담배’는 안 된다. 그러나 스님은 ‘술과 담배’도 ‘고기’도 ‘결혼’도 안 된다.(종단별로 차이가 있다) 거기다 ‘머리카락’까지 깎는다. 그러므로 스님이 성직자 중에서 가장 어렵고 훌륭하다. 이런 논리였다. 술자리에서 들었는데 수긍하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사실 이런 비교가 아니더라도 각 종교의 엄격한 계율 때문에 성직자들을 우리가 모르는 어려움이 상당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적 계율에 철저한 성직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아름답고, 그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신도들은 그 성직자들을 존경한다. 반대로 계율을 잘 지키지 않는 성직자들을 볼 때면 실망감을 느낀다. 그러나 나는 불교인이기 때문에, 세상사 인연을 뒤로하고 출가하여 삭발하고 승복입고 염주 걸고 부처님 전에 엎드린 간절한 모습의 외형 그 하나만으로도 스님을 존경한다.

그런데 우리보다 한발 앞선 동시대를 사셨던, 그리고 전설이 돼 버린 한 스님이 계셨다. 지금은 ‘지허(知虛)’라는 법명만 전해오는 분이지만, 그 스님의 저작물은 엄연히 전해 오고 있다. 이 저작물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소개되어 꾸준히 읽히고 있다. 그래서 아직 인연이 닿지 않은 분들께 꼭 읽어드리고 싶어 이번 호에 골랐다. 바로 <사벽의 대화(四壁의 對話)>와 <선방일기(禪房日記)>라는 책이다.

두 책의 저자는 이미 입적했으리라 추측되고, 출간 초기부터 지금까지 상업광고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소문과 함께 많이 읽혀 더욱 유명한 듯하다. 또한 저자로 알려진 ‘지허 스님’의 실체에 대한 궁금증과 글에 나타난 수행자로서의 고뇌와 치열함, 솔직담백함 그리고 글 전반에 흐르는 주지적(主知的)이고도 유려한 문장으로 인해 더욱 사랑을 받았다고 본다.

<삽화=배종훈>

<사벽의 대화>는 임인년(1962년) 음력 2월 16일 춘분절에 ‘지허’라는 법명을 가진 스님이 강원도 정선 정암사에서 험준한 산길을 따라 북쪽으로 20여리 떨어진 ‘심적(深寂)’이라는 토굴에 가서, 이미 자리를 잡고 수행 중이던 ‘석우(石牛)’라는 법명의 도반과 해후(邂逅)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해발 1,000미터의 산중은 늦가을부터 봄까지 눈이 많고 추웠다. 토굴은 허술했고, 잠자리는 거칠었다. 옷은 누더기 한 벌 뿐. 먹을거리는 꿀밤(도토리)과 가을에 저장한 무, 산나물과 소금으로 스스로 제한하고 있었다. 마실 물조차 부족했다. 두 도반은 그곳에서 치열한 일상으로 깨달음의 길을 찾아 정진한다.

지허 스님과 석우 스님은 이미 3년 전 초발심 시절에 공부를 하려고 해인사 강원을 찾아 갔다가, 고령 반룡사에서 경전 공부를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조차 마음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사벽의 대화>에 나오는 두 도반의 대화 내용은 시종 아름답고, 심오하고, 유려하다. 나는 책을 읽는 동안 줄곧 투명인간이 되어 그들의 대화를 곁에서 듣고 있는 듯 착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선방일기>의 저자이기도 한 지허 스님은 이토록 깊고 아름다운 글을 남겼음에도 그 실체와 행적에 대해 뚜렷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선방일기>가 발표된 2년 후인 1975년에 입적하였다는 소문도 있고, ‘서울대학교 출신으로 탄허 스님의 상좌로 열심히 수행한 납자였다.’는 주장이 있는가하면, 이런 이야기는 ‘불확실한 설’이라는 반박도 있다.

<선방일기>도 1973년 <신동아>에 ‘논픽션 공모로 당선됐다.’는 주장과 당선이 아니라 ‘단순히 게재됐던 논픽션’ 글이라는 주장이 엇갈린다. 아무튼 <사벽의 대화> 내용으로 미뤄 짐작하면, 지허 스님이 한국전쟁 후 어렵던 시절인 1957~1958년경 입산한 것만은 확실하다. 지허 스님이 항상 자세를 낮추며, 깊은 공부를 부러워하는 대화 상대인 ‘석우’ 스님은 부산 범어사 출신의 엘리트 수좌였다고 알려진다.

이제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여기저기 갈피에 표시해두었던 두 스님의 대화 내용을 편편이 인용해 보겠다.

“지허당, 범부가 고뇌 속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까닭은 자기 자신에겐 언제나 관대하기 때문이오. 자신의 과오에는 눈을 감지만, 타인의 과오에는 눈을 부릅뜨는 게 범부의 소행이요. 백안(白眼)을 안에 감추고 득안(得眼)을 밖에 표방하는 게 승직을 생업으로 삼는 승직자의 소행이오. 양의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위선자를 가장 많이 양성하여 배출시킨 곳이 승원(僧院, 수도원)이오. 가증스럽게도 위선자가 많은 승원일수록 참배자가 많소.”

- (3편 ‘간경생활’ 중에서)

“불꽃이 다하면 남는 것은 재뿐입니다. 재는 모닥불 자리에 스며들기도 하지만 바람에 불려 좀 더 먼 곳으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재는 모든 식물의 뿌리로 스며들어 그 식물의 생장을 도우면서 다시 생성의 과정에 오르는 것입니다. 여기 모닥불을 피운 자리는 틀림없이 한 물체의 멸망의 터이지만 내년 봄에 어떤 식물의 씨앗이 떨어지면 다시 생성의 터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자연의 법칙입니다. 이 자연의 법칙이 자연의 일부분인 인간에게 그대로 적용되어 장송곡의 애도 속에 영구차가 지나가는데 갓난아이의 고고성(呱呱聲)이 발칙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 (10편 ‘이해와 사랑’ 중에서)

“지허당, 지금부터 꼭 십년 전인 계사년 정월 …… 나는 육군병원에서 퇴원하자 오른발을 약간 절뚝거리면서 부산 시내로 들어갔습니다. 선배들의 알선으로 곧 취직이 됐습니다. 보름동안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대학원에 진학하려던 계획이 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취소되면서 학교로 향하던 발길이 엉뚱하게도 시가지를 벗어나 눈을 맞으면서 ‘범어사’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 (10편 ‘이해와 사랑’ 중에서)

한 편의 소설 같은 석우 스님의 출가 인연과 수행이야기의 단편이다. 어둡고 가난했던 시절에 출가했던 두 지성은 삶과 구도의 길에서 갈등하고, 공감하면서 매우 치열하게 수행했다. 그렇다고 책의 전반에 구도자의 따분한 고뇌와 갈등만 넘치는 것은 아니다.

반룡사에서 간경(看經)하던 시절, 어느 날 두 스님은 장도 볼 겸 외출을 했다. 읍내 포교당을 들렀다가 거리를 지나는데 어느 시골학교 교실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연주에 이끌려 발길을 옮긴다. 그곳에서 두 스님은 ‘은파(銀波)’와 베토벤의 ‘열정’을 황홀하게 연주한다. 전후의 피폐한 환경에서 일어난 그 상황은 순간, 한 편의 동화를 읽는 느낌이었다.

아무튼 둔필을 탓하며, 반전의 반전이 있는 <사벽의 대화>는 <선방일기>와 함께 독자님들이 직접 읽으며 느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며 마무리를 한다.

개인적으로 조심스러운 추측과 생각을 첨언하자면, 이 글에 등장하는 지허 ·  석우 두 스님은 혹시 동일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즉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치열한 생각의 갈래를 모두 나타내기 위해 또 하나의 인물을 설정한 소설적 기교의 결과가 아닐까? 왜냐하면, 녹음기가 없던 시절 평범한 대화도 아닌 종교적이고, 철학적이고, 현학적인 방대한 대화를 기억해서 복기(復碁)하듯이 옮겨 적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일기형식의 수기로 발표됐다고 하나, 소설적 복선과 긴장감과 스토리가 잘 어우러진 기막힌 문학작품이기도하다.

이계진

방송인. 고려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후 30년간 아나운서로 활동했다. 제17대, 18대 국회의원. 현재 국방FM 시사프로그램을 진행 중이고, 〈무소유〉 읽기 작은 모임을 주관하고 있다. 저서로 〈아나운서 되기〉, 〈뉴스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딸꾹!〉, 소설 〈솔베이지의 노래〉, 〈바보화가 한인현 이야기〉, 〈이계진이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 〈똥꼬 할아버지와 장미꽃 손자〉, 〈3인 아나운서 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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