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속종교와 불교융합 독특한 색채

타이베이 용산사.

토속종교와 불교 융합
독특한 색채
1960년대 비약 발전,
세계에 우뚝

필자는 여행작가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나라를 소개해 왔을 뿐, 불교 전문가는 아니다. 그런 이유로 대만은 2009년부터 2015년까지 총 세 차례 취재했지만, 대만불교에 대한 원고청탁은 선뜻 수락하기 어려웠다. 고민 끝에 두 차례 참배한 인연이 있는 타이베이 용산사를 중심으로 대만불교에 대해 단편적으로나마 소개해 보고자 한다.

대만(臺灣, 타이완)은 한반도의 서남쪽, 마카오와 홍콩이 있는 광동성 동쪽에 위치한 섬으로, 중국 복건성(福建省, 푸젠성)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다. 정식 명칭은 ‘중화민국(中華民國)’이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 왕조가 무너진 후 성립된 공화국의 이름을 그대로 잇고 있다. 1949년 장개석이 이끌던 국민당이 공산당에 밀려 본토를 떠나게 되면서 대만에 자리를 잡았다.

타이베이 용산사의 일주문. 밤낮없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대만이 중국의 일부인지, 독립국가인지에 대해서는 양국 간에 정치적으로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하지만, 문화적 측면에서 대만 문화가 중국 복건성에 뿌리를 두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대만은 인구의 93% 정도가 불교와 도교 · 유교 등 전통종교를 믿는다. 우리나라 · 중국 본토 · 일본 등 대승불교권과 비교할 때 불교신자 비율이 단연 높다. 티베트불교와 함께 세계 대승불교계를 견인하는 대만불교의 원동력이다. 동아시아 문명권에 속하는 우리나라도 불교와 함께 도교와 유교가 낯설지 않은데, 대만에서는 세 종교가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혼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복건성의 토착종교를 비롯해 대표적인 민간신앙까지 불교가 포용하고 있다는 건 큰 특징이다.

용산사는 소원을 잘 이루어주기로 유명한 ‘소원성취명당’이다. 점궤풀이를 위한 점궤지.

중국 대륙에 공산주의가 뿌리를 내리는 동안 대만은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으로써 정치 · 경제적으로 빠르게 발전했다. 특히 1980년대는 대한민국과 함께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릴 정도로 번영을 누렸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시기에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잠시나마 일본불교의 영향 아래 있었으나, 독립 후에는 동남아시아 전역에 퍼져있는 화교와 교류하며, 중국식이 아닌 대만식 불교를 전파하는 중심지 역할을 해오고 있다.

중국 대륙에서는 문화혁명(1966~1976)이 전개되는 동안 일체의 종교 행위가 철저하게 탄압되었다. 이로 인해 중국의 불교는 오히려 대만에서 원형에 가깝게 보존돼 있다고 할 수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용산사의 직원이 한 신도에게 점궤풀이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다.

대만 역사 속의 불교

대만의 불교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대만의 역사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대만 역사는 크게 16세기 이전, 네덜란드 강점기(1624~1662), 한족 정씨왕조(1662~1683), 청조시대(1683~1895), 일제강점기(1895~1945) 그리고 국공 내전(國共内戰)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대만에 불교가 공식 전래된 시기는 17세기 중엽이다. 명나라가 망한 후 청나라가 세워지자 반청(反淸)운동을 펼치던 정성공(鄭成功)이 근거지를 마련하고자 군병 2500명을 이끌고 대만으로 건너간다. 당시 대만은 30여 년째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정성공은 이를 물리치고, 대만을 점령한다. 이를 계기로 대만에 중국 불교가 본격적으로 전해진다.

용산사는 사찰 밖에서 바라봐도 화려하다.

중국 본토의 불교가 그러하듯 대만불교도 토속 종교와 습합된 기복적인 신앙형태로 이어져왔다. 이후 대만불교는 제2차 세계대전 등 격변기를 지나 1960년대 이후에 와서야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즉, 1700년 전 불교가 전래된 우리나라와 비교한다면 대만불교의 역사는 무척 짧다고 말할 수 있다.

옛 기록에 따르면 당나라 때 이미 금문도(金門島)에 영제사(靈濟寺)란 절이 있었다고 하지만, 대만 학계에서는 최초의 사찰을 1662년에 창건된 대남시 죽계사(竹溪寺)로 보고 있다. 이어 정성공의 아들인 정순(鄭純)이 미타사를 세웠다. 그리고 3대에 걸친 정 씨의 반청운동을 강희제가 굴복시킨 후 청나라 말기까지 대만 전역에 100개가 넘는 사찰이 건립됐다.

그런데 1895년 청일전쟁의 패전으로 중국은 대만을 일본에 할양한다. 이로 인해 2차 세계대전이 종전하는 1945년까지 대만은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고, 일본불교의 여러 종파가 대만에 진출한다. 이로 인해 대만불교는 육식을 하고, 결혼을 허락하는 일본 불교에 물들어 간다. 다행히도 1949년 장개석 정부가 건너온 후 불교를 정화시키면서 계율을 엄정히 지키게 한 덕분에 옛 불교의 맥을 되살릴 수 있었다.

오늘날 대만불교를 말하면, 가장 먼저 불광산사를 떠올리곤 한다. 성운 대사가 불광산사의 지회를 세계 곳곳에 세우며 그 위상을 높였기 때문인데, 사실 가오슝에 있는 불광산사는 1967년에 창건된 사찰이다. 반면 타이베이 최초의 사찰인 용산사(龍山寺)는 대만불교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찰 중 하나다.

용산사는 1738년 복건성 이주민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세웠다고 전한다. 화재와 폭격 등으로 수차례 훼손되었으나 1957년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했다.

용산사의 바다신 마조와 일곱 신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에 위치한 용산사는 국가2급 고적에 해당하는 고찰(古刹)이다. 이 사찰은 불교뿐만이 아니라 도교 · 유교는 물론 민간신앙까지 중국 종교문화를 품고 있는 ‘복건성 이주민의 정신적 고향’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다보니 오직 대만에서만 만날 수 있는, 대만식 사찰의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용산사 정문에 들어서면 두 마리의 거대한 용이 새겨진 기둥이 삼천전 좌우에 자리 잡고 있다. ‘대만에서 유일하게 한 덩어리의 청동을 쪼아 만든 용 기둥’인데, 자세히 보면 가운데가 빈 이중구조의 형태를 띠고 있다. 전면에는 신수(神獸), 후면에는 중국 신화 속 인물들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조각 기간만 10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무게가 무려 50톤에 달하는 걸작이다. 용산사 청동기둥은 대만 전체에서도 단 두 개뿐인 희귀한 건축물이자 예술품으로 전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양식이다. 현재 대만에는 공식적으로 지정된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없다. 그러나 훗날 중국과의 정치적인 문제가 해결된다면, 용산사와 예류지질공원이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힌다.

삼천전 좌우를 받치고 있는 청동 기둥에는 거대한 용이 새겨져 있다.

용산사 지붕은 헐산식(歇山式) 겹처마 양식으로 기와 한 장 한 장이 화려하게 채색돼 있고, 지붕마다 화려한 조각을 매달고 있다. 사찰답지 않게 화려한 조각과 색채는 단정한 한국 사찰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지붕의 용마루나 치미 등에 새겨진 동물상은 용 · 봉황 · 기린 등 중국문화 속 신수인데 색유리나 도자기 조각으로 장식돼 있다. 타이베이 벽산사의 화려함도 마찬가진데 대만불교의 특징으로 봐야할 것 같다. 용산사 회랑과 전각 벽면에는 중국의 고대 설화, ‘꽃이 장식된 발 달린 도자기’ 교지도(交趾陶), 호랑이와 용 등 지극히 중국적인 소재를 다룬 그림이 그려져 있다.

용산사 전각 지붕과 용머리의 화려한 장식들.

용산사에 가면 복건성의 바다신인 마조(媽祖)도 만날 수 있다. 한국 사찰에도 ‘산신각’이나 ‘칠성각’이 있듯이 불교와 토착신앙의 융합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사례다. ‘바다의 여신’ 마조는 960년 복건성에서 태어난 실존 인물로 신격화된 경우다. 마조는 어렸을 때부터 신통력이 있었을 뿐 아니라 박식 · 현명했는데, 결국 ‘항해의 수호신’이란 별칭을 갖게 되었다.

해안도시, 항구도시, 어부마을 등 중국을 비롯해 동남아시아와 일본의 일부 지역 등 ‘해양문명권’에는 마조의 흔적이 상당히 남아 있다. 마조는 토착신 중 하나로, 여신의 탄신일은 대만 5대 축제 중 하나다. 용산사 외에도 마조를 모신 사찰이라면 반드시 두 명의 호법을 함께 모신다. 우측의 천리안(千里眼)과 좌측의 순풍이(順風耳)다. 각각 멀리 보는 능력과 소리를 잘 듣는 능력을 갖고 있어, 이들로 인해 마조는 바다에서 중생이 겪는 고통과 역경을 누구보다 빨리 알 수 있다. 마치 천수천안을 가진 관세음보살을 연상케 한다.

용산사의 정중앙에 해당하는 배전과 정전에는 ‘7개의 거대한 향로’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향로마다 특별한 신의 이름과 이에 해당하는 각각의 의미도 깃들어 있다. 용산사의 수많은 신들 중에 영험하기로 이름난 일곱 신이 자신의 향로를 갖고 있는 셈이다. 이는 ‘인간의 보편적인 7가지 고민’을 뜻한다고 한다. 7개의 향로 앞에는 소원을 비는 현지인들의 참배가 끊이지 않는다. 각각의 향로와 모시는 신은 다음과 같다. △관음로 - 불교의 관세음보살 △천공로 - 도교의 옥황상제 △마조로 - 바다의 여신 마조 △수선로 - 바다의 수호신 수선존왕 △주생로 - 순산, 다산, 출산의 신 주생랑랑 △문창로 - 합격, 승진을 관장하는 문창제군 △관성로 - 재신 관우.

대만에서 청동 기둥을 볼 수 있는 사찰은 용산사가 유일하다.

폭격에서 시민 구한 관세음보살

타이베이 시민들이 용산사를 최고의 사찰로 손꼽으며, 사랑하는 이유는 그 영험함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는 역사적 사건을 소개하면 이렇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인근 주민들은 공습경보가 발령될 때마다 용산사로 대피했다. 불심이 깊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호로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또다시 공습경보가 발령해 주민들이 용산사로 대피를 했다. 그런데 엄청나게 많은 모기떼가 날아와 용산사로 대피한 사람들에게 몰려들었다. 견디다 못한 주민들이 용산사에서 나와 다른 장소로 옮겨 대피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주민들이 용산사를 벗어나서 다른 장소에 안전하게 대피한 직후 용산사에 공습이 가해졌다. 폭격으로 인해 절은 초토화 되었다. 폭격이 끝난 후 주민들이 용산사로 달려갔다. 폭격을 맞은 절이 무사할리 만무했다. 전각은 무너졌고, 포탄의 연기가 피어오르는 등 용산사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대전에 모셔져 있던 ‘관세음보살상’만은 아무 피해 없이 멀쩡했다. 이에 주민들은 폭격을 피했던 것이 관세음보살의 가호라고 생각해 용산사를 다시 재건한 후 관세음보살을 크게 모셨다고 한다.

동남아 불교권의 불자들은 단기출가를 하는 등 불교와 삶이 한 테두리 안에서 공존한다. 반면 대만의 불자들은 보다 기복적이다. 하지만 그 계율을 지키는 마음은 그 누구 못지않게 단단하다. 대만은 청나라 지배를 받을 때 재가거사들에 의한 재교(齋敎)가 크게 번성했다. 재교는 선불교에서 기원했다고 하는데, 이들은 정진요리(精進料理, 채식)를 먹고, 음주와 도박을 멀리하며, 계율을 철저히 지켰다. 이런 전통은 대만불교가 재건되면서 다시 불자들 사이에 확산되었다.

대만불교는 1960년대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그 선봉에 중국의 전통불교를 계승하면서 승풍을 진작시켰고, 출가자가 계율을 엄격히 지키면서 사회적 위상도 높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대만불교를 세계에 알리는 두 고승이 등장하는데, 바로 성운 대사와 증엄 대사다. 세계 30여 개국에 200여 분원을 두고 있는 불광산사와 전 세계에 400만 명의 회원을 자랑하는 자제공덕회는 대만불교를 세계 위에 우뚝 올려놓았다.

용산사 천상성모전(天上聖母殿).

조명화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편집장. 아리랑TV ‘Artravel’(2016), KBS2 ‘세상은 넓다-벨기에&오키나와’편(2015) 등 방송에 출연한 바 있다. 〈원코스 대만 용산사〉·〈지식의 방주 세계유산〉 5부작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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