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수레와 큰 수레의 경계는 없었다

인도에 거주하는 노령의 티베트 불자에게 축원을
해주는 달라이라마. <사진출처=달라이라마 공식사이트>

다람살라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눈은 떴지만 눈꺼풀이 천 근 같이 무겁다. 경주를 떠나던 날 아침, 뉴델리에 도착해 다람살라행 비행기를 타기 위한 다음 날 아침, 그리고 다람살라에서 처음 맞이한 오늘 아침까지 3일 연속 일찍 일어났기 때문이다.

게으름이 잔뜩 묻어나는 몸짓으로 호텔 커튼을 열어젖히자 노오란 아침 해가 발아래 펼쳐진 뭉게구름 위로 얼굴을 내민다. 다람살라의 9월은 비가 잦은 시기여서 하루에도 몇 차례씩 가늘고 약한 비가 내리는데, 그로 인해 해님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아침 일찍 해발 1,800미터 호텔 창가에서 뭉게구름 위로 비치는 아침햇살을 맞이하고 보니 무척이나 반가웠고, 또 아름다웠다.

오늘은 달라이라마 존자가 아시아인을 위해 법회를 여는 첫 날이다. 존자께서는 티베트 망명정부의 수장이기 때문에 보안이 철저하다. 법회가 열리는 남걀사원에 들어갈 때는 금지된 물품이 정해져 있고, 이외 간단한 소지품만 들고 갈 수 있다. 하지만 이때도 보안 요원들로부터 확인을 받아야 한다. 그렇다보니 법회 시작 두어 시간 전부터 줄을 서야 법회시간에 제때 들어갈 수 있다. 이른 새벽부터 아침 식사를 마친 아시아 각국의 참배객들은 우산을 받쳐 든 채 좁은 사원 입구 앞에 길게 줄을 서야했다.

필자는 법회 준비위원이었던 덕분에 긴 줄을 서지는 않았다. 대신 먼저 입장해서 어제 만나 미팅을 가졌던 싱가포르에서 온 준비위원들과 함께 나라별로 배정된 자리를 재차 확인했다. 날짜마다 나라별로 배정된 자리는 다르게 조정했다. 그리 넓지 않은 사원에 아시아인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온 참배객들이 모이다보니 모든 이들에게 존자님을 가까이에서 뵐 수 있는 기회를 주려는 배려다. 싱가포르 준비위원뿐만 아니라 태국과 대만 등 여러 나라의 준비위원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그저 성스럽고 환희에 찬 법회가 되도록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법회 시간이 다가오자 사원 1, 2층의 법당과 마당 등 모든 공간은 비닐봉투에 신발을 넣은 채 방석 하나로 자신의 공간을 허락받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각 나라의 언어로 존자님의 말씀을 전할 통역사들은 청중들 속에서 조그마한 좌식 책상 위에 간단한 필기구를 올려두고 앉아 통역을 시작하였다. 참배객들은 각자 준비해온 소형라디오에 각 언어별로 배정된 주파수를 맞추어 통역을 들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어디선가 한 차례 탄성이 들리더니 존자님께서 여러 수행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온다. 티베트인들에게 달라이라마 존자는 고타마 붓다이고, 관세음보살이며, 이 세상 모든 성스러움의 결정체이다. 존자가 지나가는 길마다 사람들이 일어나 합장하며 경의를 표한다.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고령의 수행자는 손을 흔들며 구석구석까지 시선을 보내고, 가끔 행렬 바로 옆에서 손을 뻗은 청중들에게 악수를 청하기도 한다.

군중들에게 인사하는 달라이라마.
<사진출처=달라이라마 공식사이트>

존자께서 사원 가장 높은 곳의 법좌에 앉자 그 주위에 자줏빛 승복의 티베트 스님들이, 노란색 승복을 걸친 스리랑카 스님들이, 태국 스님들이, 그리고 회색빛 승복을 걸친 대만과 한국의 스님들이 나눠 앉았다. 가사장삼의 색깔이 다르고,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경전의 언어도 다르지만, 이곳에 모인 모두는 불제자였다. 그저 한 평생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대로 공부와 수행을 이어온 법 높은 수행승의 이야기를 들으러 왔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소승과 대승의 구분은 너무도 무의미했다.

흔히 인도 · 스리랑카 · 미얀마 · 태국 등 동남아시아권으로 퍼진 불교를 ‘소승불교’라 부르고,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 · 티베트 · 일본 등으로 퍼져나간 불교를 ‘대승불교’라 칭한다. 불교를 잘 모르던 시절에는 왜 ‘소승(小乘)’ 불교권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낮춰 ‘작은 수레’라고 불렀을까? 왜 그들은 스스로를 ‘큰, 위대한 수레’의 의미를 가진 ‘대승(大乘)’으로 부르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소승’의 ‘소(小)’에 해당하는 단어를 인도에서 찾으면 ‘히나(hīna)’에 해당한다. 이 단어는 ‘버려져야 할’, ‘열등한’, ‘결핍된’ 등의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한문으로 번역된 ‘소승’의 의미는 단순히 ‘작은 수레’ 정도의 아니라, 그 이상의 매우 부정적인 의미가 들어있다고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상식적으로도 동남아 불교권에서 스스로를 ‘소승’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소승’과 ‘대승’은 기원전후에 성립된 소수의 ‘대승’ 불교도가 새로운 불교운동을 전개하면서 기존에 있던 기성 불교를 폄하시키기 위해 지어낸 용어다. 그렇다면 대승불교라는 하나의 새로운 흐름은 어디서, 어떻게, 어떠한 집단에 의해 시작되었을까? 결론만 말하자면 ‘No Body Knows!’(그건 아무도 모른다!)

우리나라 불교는 대승불교에 속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불교계는 대승을 불교의 가장 발전된 체계, 혹은 불교를 대표하는 체계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당연히 신도들에게도 이렇게 가르친다. 간혹 불교를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은 주위의 ‘대승불교도들’에게 ‘원래 대승은 소수였고, 비주류였다. 오히려 소승이 다수였고, 주류였다.’거나 ‘대승불교의 시작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고 말하면 큰 충격(?)을 받기도 한다.

그렇다면 중국이 불교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던 시대에 대승과 소승의 관계는 어땠을까? 인도에서 불교를 받아들여 대승불교의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운 중국의 승려들이 인도로 유학을 떠났을 때, 그들에게 어쩌면 인도는 ‘대승불교’의 나라였을 것이다. 서기 399년, 법현(法顯, 339~420) 스님은 예순 중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장안을 출발해 인도로 구법(求法)을 떠났다. 그는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인도를 순례한 후 귀국해 저술한 〈법현전〉에 따르면 인도의 불교사원에는 대승과 소승을 따르는 두 부류의 수행자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200여 년이 흐른 629년, 인도로 유학을 떠났던 삼장법사 현장(600?~664) 스님의 순례기 〈대당서역기〉와 조금 더 후대인 의정(義淨, 635~713) 스님의 순례기 〈남해기귀내법전〉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즉, 중국 구법승들이 전해주는 기록에 의하면 5~7세기 인도의 대승불교는 독자적인 계율을 갖고 있지 않았고, 자신이 소속한 사원의 ‘소승’ 계율을 따르고 있었다. 달리 말해, 교리가 다른 두 집단이 동일한 공간에서 생활을 했다는 것은 서로의 정체성에 거부감을 가지지 않은 채 공존하고 있었다는 걸 의미한다.

물론 대승불교는 인류문화사에서 세계 종교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며 그 철학적 심오함과 대중적 확장성을 증명했다. 단, 불교학이라는 정교한 학문의 세계에서 초기 대승불교의 기원은 여전히 매우 풀기 어려운 문제로 남아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런 불교학자들의 고민과 상관없이, 다람살라에 모인 많은 이들은 ‘대승불교 수행자’를 뵙기 위해 그 자리에 앉은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성스러운 ‘불교수행자’를 뵙기 위해 지구를 한 바퀴, 반 바퀴를 돌아 산골마을에 온 것이다.

여러 감상에 잠겨있을 때 법좌에 앉으신 존자님의 굵고 선명한 목소리가 법당 안으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정상교

현재 금강대학교 불교문화학부 교수. 천태종립 금강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 후 일본 동경대학에서 석 ·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 동국대학교(경주) 티벳대장경역경원 전임연구원을 역임했다. 저서로 〈도쿄대학 불교학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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