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성인, 가시덤불 고통 통해 기적을 행하다

절벽 위에 지은 베네딕토 수도원.

누구에게나 집보다 편한 곳은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집을 떠날까. 필자는 “여행이란 낯설음에 머리와 가슴이 반응하며 공간에 담긴 기억의 주름을 펴는 실천”이라고 정의한다. 낯설음은 가슴의 고동, 생각의 지연이다. 낯설음에 심장은 빠르게 뛰고, 두뇌는 뒤늦게 돌아간다. 아름답게 물든 단풍을 보고 “눈에 담는다.”라고 표현하지 않고 “단풍을 호흡한다.”라고 표현하면, 그 낯설음에 우리의 두뇌는 머뭇거린다. 그 지연 속에서 역설적으로 뇌세포는 빠르게 움직이며, 그 문장에 담긴 낯선 뜻을 헤아린다. 적지 않은 시간을 거쳐서 “단풍이 여러 때깔로 물든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들숨으로 몸에 담아 잠시 머물게 하여 내 몸과 머리를 씻으며 날숨으로 의미들을 토해낸다. 여러 차례 반복하지만 감동과 의미의 차이를 만든다.”라고 풀이한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편안한 낯익음이 때로 권태로 다가오면 불편하지만 새뜻한 낯설음을 찾아 나선다. 낯선 풍경과 맛·숙소·사람을 우리의 몸이 먼저 느끼고는 떨림을 하고, 머리는 의미를 풀어내고, 둘이 모여 체험을 이루었다가 결국 추억으로 남는다.

공간은 텅 빈 곳이 아니라 힘과 요소들의 연기(緣起)와 연멸(緣滅)에 따라 형상과 시간과 기억들이 주름 잡히는 틈이다.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1879~1955)이 잘 밝힌 대로, 공간은 중력에 따라 휘어지고, 진공상태에서 빛은 초속 30만km로 일정하게 휘어진 곳을 따라 지나야 하니, 시간은 그만큼 늦게 흐른다. 대상의 공간은 몸의 공간과 관련을 맺기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간에는 기억의 주름이 잡히며, 임계치를 넘는 영향을 받거나 차원을 달리 하면 공간은 비틀어진다. 공간에 서리서리 어려 있는 기억과 서사들을 풀어내지 못한 채 아름다운 풍경, 맛난 음식, 친절한 사람, 기이한 물건만 체험하고 온다면 그건 반쪽짜리 여행이다. 중국 작가 잔홍즈(Hongzhi Zhan, 1956〜)가 <여행과 독서>에서 말한 대로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라면, 묵상은 앉든 서든 내면과 바깥세계를 오고가는 독서이자 여행이다. 새로운 공간에서 얼마나 낯선 것들을 만나 얼마나 많은 기억의 주름들을 풀어내어 의미로 반짝이게 할까? 그런 설렘으로 로마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대통령이 나서서 광신도들의 광기를 부추긴 이명박 정권 때 손원영 목사(서울기독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 개신교도가 개운사의 불상과 불구를 심하게 훼손한 것이 부끄러워 모금운동을 했다. 개운사측에서는 모금액을 사회적으로 의미 있게 사용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를 종자로 삼아 개신교·천주교·원불교 그리고 불교의 학자가 모여 종교 간의 평화와 사회 평화를 도모하는 모임 ‘레페스포럼(Religion peace forum)’을 열었다. 한 해에 두 차례씩 모여 1박2일로 발표와 토론을 하였고, 그 성과를 책으로 엮어내고 있다. 2017년에 기독교와 불교의 공통점과 차이에 대해 11명이 발표한 후 토론한 요지를 엮어서 <종교 안에서 종교를 넘어-불자와 그리스도인의 대화>를 출간했고, 현재 제2권을 편집 중이다. 작년에 손 목사가 이탈리아에 가서 ‘깨달음과 영성에 대한 동서양의 대화’라는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하면서 수도원 순례도 겸하자는 제안을 했다. 고바오로 신부와 이현숙 수녀가 적극 나서고 오세정 목사도 애쓴 덕에 제안은 현실이 되었다. 처음에 지원했던 교수들이 하나둘 학교 사정으로 못 가게 돼 그 자리를 다른 사람들이 채웠는데, 최종적으로 종교가 다양한 성직자와 교수, 신도 21명이 함께 하게 됐다.

| 수비아코에서 성금요일을 맞다

여행의 참맛은 파격에 있다. 계획에 없던 곳을 찾아가고, 길을 벗어나 헤매다가 전혀 뜻밖의 풍경과 사람을 만나고, 기대 밖의 환대를 받을 때 여행의 기쁨과 의미는 곱절이 된다. 첫날부터 그런 횡재를 했다. 로마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수비아코로 향했다.

수비아코는 아니에네 강변에 해발 400m 산지에 조성된 마을로 로마에서 동쪽으로 70km 정도 떨어졌다. BC 304년경에 로마는 아이퀴(Aequi)족이 살던 이 땅을 정복했다. 네로 황제는 로마에 물을 대고자 댐을 조성해 인공호수를 만들고, 산과 호수와 들이 어우러진 이곳이 마음에 들었는지 별장을 지었다. ‘아래’를 뜻하는 ‘숩(sub)’과 ‘물’을 뜻하는 ‘아쿠아(aqua)’를 결합하여 이 별장을 ‘호수 아래’란 뜻으로 ‘수불라쿠스(Sublacus)’로 불렀다. 이것이 나중에 ‘수비아코(Subiaco)’의 지명이 되었다. 성 베네딕토는 훗날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공인될 정도로 기독교는 물론 유럽의 문화와 문명에 실로 막대한 영향을 미친 이다. 그는 이탈리아 중부 누르시아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로마로 유학을 왔지만, 너무도 타락한 로마생활에 염증과 회의를 느끼고 23살 무렵 수비아코의 산중으로 들어가 동굴에서 기도와 묵상을 하며 살았다. 한 사람은 로마의 환락을 두메까지 끌어왔고, 한 사람은 이곳 동굴에서 로마의 환락과 단절했다. 우리는 후자의 사람을 만나 그 마음의 한 자락이라도 품고자 버스에 몸을 기댔다.

목적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수비아코의 한 마을의 성당 앞에 버스가 멈추었다. 단순하면서도 고풍스런 품격이 느껴지는 성당이다. 기사에게 물으니, 성금요일(Good Friday) 행사가 있어서 행렬이 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단다. 기독교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어 아들인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그럼에도 우리는 금요일에 그 분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했고, 예수님은 장사한 지 사흘 째 되는 날에 부활했다. 천주교도들은 성금요일을 맞아 금식을 하고 참회를 하면서 예수그리스도를 경배하고, 기도하며, 그분이 죽음으로 인간의 죄를 대신한 구세주임을 밝히는 전례와 영성체(領聖體)를 행한다.

성당의 정문 앞에는 예수님이 오상(五傷, 두 손·두 발·옆구리)에 피를 흘리신 모형이 세워져 있었고, 그 옆에는 정화의 뜻으로 장작불을 지피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어두운 회당 안에 300여 명은 됨직한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 아치와 돔이 잘 어우러진 가운데 천장화가 참 아름다웠다. 예수님이 설교하시는 장면, 예수님이 풍랑이 이는 바다를 헤치며 12제자를 배에 태워 이끌고 가는 장면, 예수님의 심장과 성배를 표현한 그림들이 구형 안에 완벽한 조화를 이룬 채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안에 거룩함이 깃들어 있어 절로 합장을 했다. 성당에서 시작하여 마을을 한 바퀴 순례한 행렬이 도착했다. 맨 앞에 신부들이 십자가를 높이 들고 그 뒤로 수백 명의 마을 사람들이 따라 행진하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성체, 그리고 성모마리아가 죽은 아들을 따라 거룩한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베네딕토 수도원은 아치와 수직 기둥을 결합하여 절벽과 거의 평행으로 벽돌을 쌓아 올려 단단하게 지었다.

| 가시덤불에 몸을 뒹굴다

밤늦게 스콜라스티카 수도원 호텔에 도착했다. 방에 들어서니 당시 수도사들의 검소하고 청빈한 삶이 그대로 다가왔다. 약간 추웠고, 별다른 장식이 없는 단출한 방에는 침대만 두 개 놓여 있었다. 창문을 여니 자연 또한 그랬다. 왼편으로는 수도원의 수직 벽이 단아하게 서 있고, 오른편으로 산의 둥그런 곡선이 이어지는데 정상에는 붉은 십자가가 빛났다. 그 사이로 하늘은 그지없이 맑고 푸르렀고, 때마침 보름달이 휘영청 밝았다. 옛 선비들은 맑은 보름달을 보며 눈을 씻었다던데, 눈에 이어 마음까지 씻기는 듯하였다.

아침을 먹고 베네딕토 수도원과 ‘사크로 스페코(Sacro Speco)’로 향했다. 버스로 산길을 10여 분 오르다가 내려서 걸었다. 순례길을 걸으며 은수자(隱修者)의 고독과 깨달음에 대해 묵상했다. 이윽고 절벽과 수도원이 보였다. 깎아지른 수십 미터의 절벽에 때로는 바위를 깎고, 때로는 구멍을 뚫으며, 붉은 벽돌을 수직으로 쌓아 올려 수도원을 지었다. 다만 경이로울 뿐이다.

누르시아의 베네딕토 성인(Sanctus Benedictus de Nursia, 480∼547)은 유모만 대동한 채 로마를 등지고 한적한 곳을 찾아 나섰다. 처음에는 엔피데 인근의 성 베드로 성당에 몸을 맡겼다. 이때 첫 번째 기적이 일어났다. 유모가 빵을 만들려고 밀가루를 체질하다가 체가 바닥에 떨어져 두 동강이 났다. 이에 절망한 유모가 우는 것을 본 베네딕토는 부서진 체 조각들을 모아놓고 하염없이 기도를 올렸는데, 기도를 끝내자 완전한 모양을 갖춘 체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베네딕토 성인은 엔피데에서 수비아코로 가다가 로마노 수사를 만나 수도복을 받고 수사가 되었다. 그 후 이곳 수비아코의 호수 위 절벽의 중간쯤에 있는 천연동굴, 사크로 스페코(Sacro Speco, 거룩한 동굴)에 머물며 3년 동안 외부와 접촉을 완전히 끊은 채 기도하고 묵상했다. 로마노 수사는 동굴에 들어갈 수가 없어 정기적으로 절벽 위에서 기다란 밧줄에 빵을 매달아 동굴로 내려 보냈다고 한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 몇 층을 내려가니 그 동굴이 나왔다. 좁디좁은 동굴 안에는 흰 대리석으로 조각한 청년 베네딕토의 대리석상과 십자가, 빵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동굴 앞에서 깊은 고독과 고통, 그를 극복한 신앙심에 대해 조금이나마 헤아리며 경배의 뜻으로 합장을 했다.

그가 기도와 묵상만으로 보내던 어느 날, 마귀가 나타나서 예전에 그와 사랑을 나누었던 여인을 떠올리게 했다. 관능적인 여인의 나신, 그녀와 나누었던 사랑의 황홀한 기억들이 요동치며 정욕의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은둔 수행을 그만 두고 마을로 내려가 육욕에 탐닉하고픈 충동이 들었다. 동굴을 떠나 그 여인을 찾고자 주변을 정리하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노한 음성이 들렸다. 마침 동굴 옆에 쐐기풀과 가시덤불이 보였다. 그는 옷을 모두 벗어던지고, 가시덤불에 뛰어들어 뒹굴었다. 가시가 살을 파고들었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욕정이 사라질 때까지 오랫동안 고행을 계속 하며 기도했다. 어느 순간 아름다운 여신의 나신도, 황홀한 기억도, 그를 추동하던 욕정도 말끔히 사라졌다.

“그는 육신의 쾌락을 즉시 육신의 고통과 맞바꾸어, 찢어진 살과 상처로 영혼의 찢긴 상처를 보듬어 깨끗하게 간수할 수 있었다. 성인은 영혼을 깨끗하게 보전하기 위해 육신을 냉엄하게 다루는 길을 찾았던 것이다.”(손태섭 편역, <베네딕토 성인> 19쪽)

동굴 밖에 그 정원이 아직 남아 있었다. 5각형의 정원에서 한 신부가 몸을 뒹구는 대신 쇠스랑으로 흙을 고르고 있었다.

베네딕토는 고독한 은수자의 삶을 지속하기로 했지만,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대로 그의 숨은 인품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게 됐고, 많은 사람이 찾게 됐다. 인근에 있는 비코바로 수도원장이 선종(善終)하자 수도자들이 그 자리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베네딕토는 재차 거절하다가 계속된 간청에 못 이겨서 아빠스(수도원장)를 맡았다.

“베네딕토는 엄격한 규율을 엄수할 것을 강조하면서 부정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완덕의 길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수사들을 독려하며 그들의 이전 생활을 쇄신할 것을 신신당부하였다. 이에 수도사들은 점점 불만이 쌓였다. 자유분방하게 살던 수도사들은 점점 불만을 품게 되었고, 이에 수도사들이 그를 암살하고자 포도주에 독약을 섞어서 권했다. 베네딕토가 식사 전에 축복 기도를 하기 위해 성호를 긋자 그 잔이 짤그랑 소리를 내며 저만큼 내동댕이쳐져 박살이 났다.”(같은 책, 23∼25쪽)

그들은 겉은 수도사들이지만 악을 즐기는 이들인 ‘사라바이따(sarabaita)’들이었다. 베네딕토는 그들의 음모를 눈치 챘고, 고별사를 남기고는 그 날로 수도원을 떠나 수비아코 동굴로 돌아왔다. 베네딕토는 이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만 모아 함께 열두 곳의 작은 수도원을 세워 공동체생활을 시작했다.

베네딕토 수도원 위의 바위절벽. 저 위에서 로마노 수사가 바구니에 빵을 담은 밧줄을 내려 동굴에서 수도하던 배네딕토 성인에게 전하였다.

| 자장율사를 떠올리다

베데딕토는 <베네딕토 규칙서(Regula Benedicti)>를 기술했다. 스승인 요한 카시아노의 <스승의 규칙서(Regula Magistri)>를 다듬었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서>와 함께 중세 수도원과 수도사들의 삶과 수도생활을 규정하는 최고의 규율서였다. 중세에 세워진 대부분의 공동체와 수도원은 이 규칙서의 규율을 준수했고, 그 정신을 이어받았다. 수도사들은 이를 엄수하며 생활했고, 타락을 경계했으며, 마침내 무한을 향한 초월에 이르렀다. 이는 교회 바깥 사람들에게도 전해졌다. 이 규칙서는 교회와 수도사들이 타락에 휩싸일 때마다 이를 물리치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명(順命)하는 지침이 되었다.

베네딕토 성인이 기도하고 묵상한 사크라 스페코. 흰 대리석으로 조각한 청년 베네딕토의 대리석상과 십자가, 빵 바구니가 놓여 있다.

이곳에서 수도하고 있는 마디오 신부가 순례 내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순례를 마치고 이현숙 수녀의 통역 도움을 받아 그와 간단한 대화를 나누었다. 아래의 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 이야기를 들려주며 두 성인 사이에 차이가 너무 크지만 통하는 점도 있다고 말했다.

“자장율사는 깊은 산으로 들어가 인생의 무상함이 마른 뼈와 같음을 깨닫는 고골관(枯骨觀)을 닦았다. 작은 집을 짓고 방 안에 가시덤불로 울타리를 둘러쳤다. 옷을 벗고 그 속에 앉아 정좌했다. 조금만 움직이기만 하면 가시가 몸을 찔러 심한 통증이 왔다. 머리카락을 묶어 끈을 천장에 매달았다. 티끌만치라도 고개를 숙이면 끈이 머리를 당겨 머리거죽이 찢기는 듯했다. 처음엔 숱하게 가시가 몸을 찌르고 끈이 머리를 잡아당겼지만, 점차 잦아들었고, 마침내 마음을 모아 도를 닦게 되었다.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이 재상의 자리가 비어 있어 그를 여러 번 불렀지만 매번 거절했다. 왕이 ‘만일 나오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라고 칙명을 내리자, 자장율사는 ‘소승이 하루 동안 계율(戒律)을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100년 동안 계율을 어기고 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답했다. 왕도 어쩔 수 없이 그의 출가와 수도를 허락했다. 자장율사가 바위 사이에 깊이 숨어 살며 수행을 하니, 양식 한 알 돌봐 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기이하게 생긴 새가 과일을 물어다 바쳐서 이것을 손으로 받아먹었다. 이윽고 꿈에 천인(天人)이 와서 오계(五戒)를 주었다.” (<삼국유사>, ‘자장이 계율을 정하다’ 참고)

훌륭한 안내를 해 준 마디오 신부, 통역을 해 준 이현숙 수녀, 그리고 필자.

이후 자장은 대국통이 되어 승려의 규범과 승통의 일체를 주관했으며, 전국 각처에 10여 곳의 절과 탑을 세웠다. 특히 당나라에서 가져온 불사리(佛舍利)를 모시고 수계의식(授戒儀式)을 집행하는 통도사 금강계단을 만들었다.

두 사람 모두 육신의 고통을 통해 마음을 청정하게 했고, 마침내 욕정을 말끔히 씻어내 기적을 행하고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자신들이 그런 만큼 엄격한 계율을 만들었고, 이 계율은 성직자나 수행자들이 타락의 유혹을 물리치고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맑고 올곧게 수행하는 지침이 되었다. 나아가 각각 불교나 기독교가 흥기하는 기틀을 세웠다. 남다른 처절한 고독과 지극한 고통에 이르러서만 남들에게 감추어진 진리를 슬며시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현재 지순협 대안대학 이사장, 정의평화불교연대 상임대표, 한국언어문화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상임의장 · 한국기호학회 회장 · 〈불교평론〉 편집위원장 · 한국학연구소장 · 〈문학과 경계〉 주간을 역임했다. 원효학술상 · 유심학술상 수상한 바 있다. 저서로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 ·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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