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 환생 바탕은 대승보살의 중생구제

2018년 9월 6일 달라이라마 존자가 다람살라에서 법문을 마친 후 세계 각국에서 찾아온 불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법회가 열리는 이맘때면 조그마한 다람살라에는 전 세계에서 온 법회 참석자 이외에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든다. 달라이라마를 만나 ‘자비’를 배우러 온 이방인들에게 ‘자비’를 구하러 저 아랫마을에서 온 걸인들이다. 며칠 내내 좁은 다람살라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마주쳤던 사람들이라 이미 낯이 익다. 법회가 마치는 시간이면 그들은 어김없이 남걀 사원 앞에서 기다리며 ‘적극적’으로 자비를 구한다.  

윤회(輪廻)로 설명하자면, 성하지 않은 몸을 이끌고 길바닥에 앉아 구걸하는 이들은 전생의 업보가 무거워서 일 것이다. 최첨단 과학의 시대에 증명할 수 없으니, 그저 ‘팔자타령’으로 보이는 윤회, 그리고 업보는 누군가에겐 지독히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리라. 

잘 알려진 바대로 윤회 및 환생 관념을 고도의 종교철학으로 구축한 것은 인도 문명이다. 따라서 윤회란 불교 고유의 사상이 아니라 불교 출현 이전에 성립된 고대 인도인들의 공통된 사후관(死後觀)이었다. 그들은 오랜 세월 자연을 관찰하다가 꽃피고 열매 맺고 그리고 낙엽 되어 떨어졌다가 다시 또 꽃 피고 열매 맺는, 계절 따라 반복되는 순환의 원리를 알게 되었다. 그렇게 올 해 본 꽃과 열매는 분명 작년의 것과 같지는 않지만 다르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들은 한 걸음 더 철학적 사고로 발을 내딛었다. 그럼 모든 생명들도 그와 같지 않을까? 화장(火葬)을 통해 하늘로 흩어져간 ‘생명’은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다시 땅으로 돌아와 곡식이 되고 결국 누군가의 ‘생명’이 된다. 이른바 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전생과 이생의 연결이었다. 

여기에 사회 윤리적 이론이 가미되어 선하거나 악한 행위에 대한 결과가 다음 생에 영향을 끼친다는 업보설이 나타나게 되었다. 결국 ‘우린 지난 생에 지은 업보를 다 하기 위해 끊임없이 나고 죽는 재생(再生)과 재사(再死)를 반복해야 한다. 따라서 바른 생각으로 바른 행위를 한다면 업보는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며, 그렇다면 시작도 없이 시작된 이 순환에서 벗어나리라.’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고 해탈이라는 관념을 고대 인도인들은 그들 종교와 철학과 사상의 근본으로 삼았다. 그러한 바탕 위에서 출현한 불교 역시 윤회를 받아들였다. 

달라이라마 14세는 분명 전생의 달라이라마의 환생이며, 티베트 불자들 중 이를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일반인들에게 윤회니 환생이니 하는 이야기는 여전히 황당한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나 역시 불교를 공부 전에는 이를 믿지 않았다. 그저 권선징악의 불교적 버전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뛰어난 인도 불교학자 중 한 분인 서울대 철학과 안성두 교수의 〈죽음 앞에서 참된 자신을 발견하기〉라는 저서를 읽은 후 나는 비로소 ‘전설 따라 삼천리’ 같던 윤회를 불교철학의 관점에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인도불교의 전통이 살아 숨 쉬는 티베트 불교, 특히 달라이라마 제도를 통해 환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달라이라마가 속한 티베트 최대 종파인 겔룩파는 티베트 불교의 대성자 쫑카파(1357~1419)대사에 의해 수립되었다. 쫑카파에게는 젠둔드룹(1391~1474)이라는 뛰어난 수제자가 있었는데 그가 93세에 입적할 때 다시 환생해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을 받아 환생하겠다고 약속했다. 달라이라마 환생 제도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티베트 불교를 논할 때 늘 떠오르는 환생제도는 죽음 이후 다음 생으로의 환생이라는 구조로 인해 그저 ‘신비스럽고 흥미로운’ 이야기 정도로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대승불교의 이상을 실현하는 보살사상에 그 맥이 닿는다.
흔히 대승불교의 보살들은 이미 깨달음을 얻었기에 다시 윤회하여 환생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고도의 수행을 통해 삶과 죽음을 뛰어넘는 능력을 가진 수행승은 비록 이번 생의 삶이 다한다고 해도 다음 생에 몸을 받고 태어날 수 있다. 이유는, 자신만이 깨달음을 얻음에 그치지 않고 오직 중생 구제를 위해서다.
‘먼저 깨달은 자가 뒤에 깨달은 자를 깨우치듯이’, 깨달은 스승이 아직 깨닫지 못한 다른 중생들을 위해 이 세계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보살도의 전범(典範)이며, 이런 점에서 환생제도는 대승보살행과 떨어져 설명될 수 없다. 물론 모든 제도가 그러하듯이 이 제도도 남용되어 원래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지만, 그것이 어찌 환생제도에 국한 될 것이겠는가? …… 불교 수행자들은 기나긴 세월 동안 체계적으로 전승된 수행과 명상을 통해 죽음의 단계를 경험할 수 있다. 죽음과, 그리고 지난 생과 다음 생의 중간 단계인 중유 과정과, 환생의 과정을 체험하면서 존재와 마음의 본성을 이해하고 윤회를 극복하는 기회로 포착한다.”  

필자는 이 해설이 불교철학에서 윤회에 대한 가장 멋진 설명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만약 윤회가 인도라는 특정 지역의 산물이라면 그것은 모든 이들에게 보편성을 가진 진리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관련 연구에 의하면 이슬람 시아파도 이러한 관념을 가지고 있고, 이슬람이나 기독교로 완전히 개종하지 않은 서아프리카나 동아프리카의 민족들도 환생을 믿고 있다고 한다. 브라질에도 환생을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아프리카에서 브라질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환생을 믿는 민족 중 그 수가 많은 것은 북아메리카 북서부에 사는 사람들이다. 이 지역의 선주민들은 ‘이생의 삶은 오직 한번뿐’이라는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영향을 받긴 했지만, 여전히 환생 신앙을 유지하고 있음이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오스트레일리아 중앙에 사는 여러 부족들, 일본 홋카이도의 아이누족 등도 환생을 믿고 있음이 문화인류학자들에 의해 보고 되었다. 

법회 후 승용차를 타고 이동하는 달라이라마가 불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또한 영국의 켈트족이나 스칸디나비아, 혹은 아이슬란드의 바이킹들도 환생 관념이 있었지만 기독교의 전파에 의해 그러한 관념은 사라진 것으로 보고 있다. 남유럽에 살던 기독교인들 중 일부도 6세기 정도까지는 환생 신앙을 가졌고, 그러한 환생관념이 공식적으로 교의의 일부가 되지는 않았지만 교회의 상층부는 이것을 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플 회의까지는 묵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그 기원과 전파의 경로는 알 수 없지만 고대 인류에게 환생이라는 사후관은 광범위하게 공유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구걸이 뭔지도 모를 벌거벗은 저 아이는 ‘인류 보편적 관념’인 윤회론에 의해 커서도 그 업보의 무게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자신의 어머니와는 다른 삶을 살아 갈 수 없다는 이야기일까? 이에 대해 인간은 태생이 아닌 행위에 의해 만들어짐을 고타마 붓다는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다.   

“곤충과 새와 물고기 등은 모두 다른 특징을 가졌고 태어남은 그 다름을 결정 짓게 하지만 인간은 어떤 계급에 속한다고 해도 모두 같은 인간일 뿐. 태어남에 의해 브라만이어야 하고 태어남에 의해 천민일수는 없다. 고귀한 행위에 의해 브라만이 되는 것이고, 악한 행위에 의해 강도와 도적이 될 뿐이리니, 브라만 집안에서 났다고 해서 브라만일 수는 없는 것이다.  굽힘 없는 수행으로 번뇌를 끊고 욕망을 없앤 자, 그를 우리는 청정한 브라만이라고 부를 뿐이다.” 

나는 다람살라를 떠나는 버스에 오르기 전 며칠 동안 마주쳤던 그 모자에게 주머니 속 얼마 안 되는 지폐를 쥐어 주었다. 비록 태어남은 남루하여도 부디 노력이라는 행위를 통해 행복하시라는 기원을 함께 담아 드렸다.  

정상교

현재 금강대학교 불교인문학부 교수. 천태종립 금강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 후 일본 동경대학에서 석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동국대학교 (경주) 티벳대장경역경원 전임연구원을 역임했다. 저서로〈도쿄대학 불교학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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