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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궁궐 속 불교이야기

기사승인 2021.07.23  11: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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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1호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
불교문화 스며든 궁궐
‘서로 닮은 듯 다른 듯’

무더운 여름이 시작됐다. 코로나19의 기세는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나들이가 쉽지 않은 시절을 감안해, 서울의 5대 궁궐을 독자여러분 대신 둘러봤다. 고풍스런 궁궐은 분명 숭유억불(崇儒抑佛) 시대에 지어졌지만, 그 속에는 불교문화가 적지 않게 스며들어 있다. 닮은 듯 다른 궁궐과 사찰로의 여행을 〈금강〉과 함께 떠나보자.

경복궁 강녕전(우측)과 경성전(좌측) 추녀마루 끝에 잡상이 올려있다. 잡상은 주로 〈서유기〉에 나오는 인물 형상을 하고 있는데, 불교적 의미나 도교적 의미로 해석한다.

궁궐건축은 사찰건축과 많이 닮았다. 한 공간 내에서 진입에 따른 여러 개의 문이 주요 전각까지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고, 중층 양식의 중심 건물, 누각과 정자, 다양한 주거시설, 위계가 설정된 건물 배치양식 등은 집단 건축물 중에서 궁궐과 사찰이 유일하다. 신라 대에 불교를 진흥시킨 진흥왕은 경주에 신궁(新宮)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나자 이를 핑계로 궁궐을 사찰로 바꾸고 ‘황룡사’라 이름한다. 이처럼 궁궐은 구조 상 사찰이 되기도 하고, 사찰과 공존하기도 했다. 41년을 재위한 백제 무왕은 익산 왕궁리에 궁궐을 지으면서 궁의 정전(正殿) 앞에 5층 석탑을 세우고, 금당과 강당을 비롯한 사찰건물을 배치했다. 사찰을 궁으로 궁궐을 사찰로 사용해도 무난했던 것이다. 그만큼 궁궐과 사찰건축은 서로 닮아있다.

경복궁, 왕실불교 흔적 곳곳에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5개 궁궐은 조선의 정궁[正宮]인 북궐 경복궁, 조선의 왕들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동궐 창덕궁·창경궁(수강궁), 서궐인 경희궁, 가장 규모가 작았던 고종의 거처 덕수궁이다.

조선의 궁궐 중 경복궁은 정도전에 의해 철저하게 성리학의 이념에 기반을 둔 건물을 배치했고, 명칭을 부여했다. 다른 궁궐들도 그에 따랐다. 그러다보니 유학자들에 의해 이단으로 배척받고 억압받은 불교의 흔적을 외관상으로 찾아보기는 너무 힘들다. 하지만 아주 드물게 불교의 진흥을 위해 힘썼던 왕실에 의해 궁궐 속 건축에 숨어 있듯 반영돼 있는 불교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

먼저 경복궁으로 가보자. 경복궁은 평지에 지어진 탓에 구조상 숨겨진 곳 없이 대부분의 건물이 한눈에 드러나 있다. 여기에 불당으로 쓰였던 건물 함원전(咸元殿)이 현존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 때 지은 건물로 불상을 모셔두고 불교의식과 행사를 열었던 곳이다. 함원전은 왕비의 거처인 교태전 바로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함원전의 후원은 ‘아미산(峨嵋山)’이라는 교태전 뒷동산과 이어져 있다. 함원전이 왕실의 지원을 받아 지어지고 이후 궁내 내불당으로서 그 지위를 지켜왔다면 불교의 흔적이 남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세히 살펴보았다.

우선 전형적인 궁궐단청에서는 주요전각 대들보의 양쪽 끝에 머리초 문양을 배치하고 중간 계풍 부분은 긋기로 마감하여 여백을 두는 금모로 단청을 사용하는데 반해 사찰은 계풍에 다색 금문·별화 등을 넣어서 그 여백을 채우는 금단청을 한다. 그런 기준에서 보면 궁궐단청 기준과 달리 경복궁의 강녕전·교태전·함원전의 대들보 중간은 여백처리가 아니라 사찰의 금단청처럼 문양이 가득하다. 더군다나 그 문양이 놀랍게도 ‘만자(卍字)’ 문양으로 동일했다. 사찰 단청 기법을 따른 것에 더해 불당으로 쓴 함원전의 대들보 문양과 모두 동일하다. 함원전이 조선의 정궁에서 불당으로 사용되고 있었던 역사적 근거와 외양의 근거가 모두 확인되는 모양새다.

경복궁 교태전의 지붕 합각에는 만(卍)자 문양이 새겨져있다.

불교의 흔적인 함원전에 감복한 것도 잠시, 함원전 뒤쪽 정원과 교태전의 뒷동산 아미산이 담장을 사이로 붙어있는데, 이 아미산의 이름에 관심이 갔다. 아미산은 경회루 연못을 파면서 나온 흙으로 쌓은 동산으로, 화계(花階, 계단식 꽃 정원) 형태로 되어 있다. 그런데 아미산이란 이름은 중국불교 4대 명산 가운데 하나와 동일하다. 중국불교 4대 명산은 저장성의 보타산, 안후이성의 구화산, 산시성의 오대산 그리고 쓰촨성의 아미산이다.

성리학에 기반을 둔 주련의 문장 하나, 건물 이름 하나까지 유학을 반영한 유학자들이 왕비의 침전[교태전] 후원의 이름을 아미산으로 정한 것은 왕실의 불교에 대한 신앙 의지가 반영된 것이리라. 함원전은 세종 15년에 창덕궁에 있던 문소전(태조의 첫째 왕비인 신의왕후 신주를 모신 곳)과 광효전을 합해 경복궁으로 옮길 때 문소전의 불당도 같이 옮겼는데 세종의 의지로 불당인 함원전을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초 정궁으로 사용하기 위해 태조에 의해 지어진 경복궁에서 불교와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 건축기법은 당가(唐家, 닫집)이다. 당가는 글의 끝부분에서 전반적으로 탐구해 보겠다.

창덕궁에 내불당 세운 세종

다음은 창덕궁으로 넘어간다. 창덕궁은 평지건축인 경복궁에 비해 야산과 계곡을 자연스레 활용해 생활하기에 훨씬 적합하고 정적들로부터 노출되지 않는 구조를 하고 있다. 그래서 500년 조선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임금들이 거처한 공간이다. 창덕궁에서 왕과 왕비의 공간인 희정당과 대조전에는 대들보에 단청 문양이 없다. 경복궁과 달리 여백으로 남아있다. 다만 팔작지붕의 측면인 합각에 모두 만자 문양으로 벽돌이 짜여 있다. 이 문양을 합각에 존치한 연유를 추정해보면 조선 왕실이나 건축담당자들이 길상과 벽사의 의미가 가미된 조각이나 문양들을 적극적으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길상과 벽사는 불교의 것이거나 도교의 것이거나 배제하지 않고 활용하고 있다. 궁궐의 지붕 추녀마루에 상징처럼 설치한 장식기와 잡상(雜像)이 대표적이고, 궁궐단청에서 연화문(연꽃무늬 문양), 보상화문(불교의 성스러움 상징 꽃) 등을 주요전각에 수없이 많이 그려 넣었다. ‘잡상’에는 주로 삼장법사와 손오공이 나오는 〈서유기〉에 등장하는 인물 형상을 하고 있는데, 불교적 의미 또는 도교적 의미로 해석한다.

궁궐의 뒷동산이자 왕가의 정원이던 창덕궁 후원에 특히 불교문화가 스며들어 있다.

창덕궁에서의 불교 흔적은 후원에 집중돼 있다. 태종 때 창덕궁이 창건되면서 거의 동시에 조성된 비원(秘苑)은 세조 때 이르러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면서 크게 궁장(宮墻, 궁을 둘러싼 성벽)을 넓히고 연지(蓮池)도 만들게 된다. 세종 말년에 이 후원은 ‘내불당 사건’으로 시끄러워 진다.

세종 15년에 불당이 같이 있었던 문소전을 경복궁으로 옮긴 이후 불당을 다시 복구하려던 세종의 의지와 유자들의 반대가 충돌했기 때문이다. 문소전의 불당(佛堂)에는 세종 즉위 1년에 각 도의 승려들이 헌상한 부처님의 사리를 모아 두었는데, 같은 해 명나라 사신이 오자 문소전의 내불당으로 불러 부처님의 사리를 보여주는 행사를 열기도 했다. 세종 5년에는 이곳에서 불경을 금으로 사경해 태종의 명복을 비는 등 조선 초기 창덕궁 내 중심 불당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했다. 일곱의 승려가 거주하면서 태조의 원찰로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인데 세종 30년에 ‘선왕이 세운 불당을 복구하는 것이 크게 중요하다.’는 명분으로 이를 복구하고자 했으나 신하들이 이를 극구 반대했다. 이에 세종은 조선조 왕의 최후의 보검인 ‘선위파동’까지 일으킨다. 이에 신하들이 끝내 항복해 내불당을 건립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 위치는 기존 문소전의 서북쪽에 인접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창덕궁 동북쪽에 해온정(解慍亭)을 짓고, 그 앞 연못에서 등(燈)놀이를 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태종 6년(1406년)에 “인소전을 지은 후 나중에 문소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기록을 보면 현재 후원의 부용지 인근에 문소전이 있었고, 그 부근에 내불당이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부용지 인근은 좁아서 북쪽 너머 연경당 가까운 곳이 아니었을까 싶다. 창덕궁 후원은 왕과 왕비의 공간이었기 때문에 정승들도 임금의 허락 없이는 들어가지 못했다. 이런 비밀스런 공간에 왕실불교가 숨을 쉬고 있었던 것이다.

창덕궁·경희궁·덕수궁의 불교 흔적

창경궁은 창덕궁과 담을 사이로 인접해 있다. 세종이 왕위를 물려준 태종의 거처로 지은 궁이다. 일제에 의해 동·식물원인 ‘창경원’이 되는 수난을 당했다. 그런 와중에 창경궁에는 불교 석탑 2기가 궁궐 내에 자리하고 있다.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 뒤 함인정 옆에 위치한 오층석탑과 춘당지 인근 팔각칠층석탑(보물 제1119호)이다. 고려시대 양식의 오층석탑과 라마탑 형태의 조선 성종 대 팔각칠층석탑은 일제강점기 때 창경원의 정원을 장식하기 위해 어디선가 동원한 탑들이다. 그렇긴 하지만 유학의 이념이 반영된 궁궐 정전의 바로 뒤에 당당하게 서 있는 오층석탑은 성리학의 이념으로 지은 건축물과는 사뭇 대비되는 모습을 띠고 있다. 춘당지를 걷다가 마주하는 팔각칠층석탑의 탑신과 옥개는 둥글게 보일 정도로 두루뭉술하게 팔각의 모양을 하고 있다. 이와 함께 기단부의 많은 조각장식들을 보면서 억불의 조선시대에 또 한 번의 불교 진흥을 꿈꾸며 간절한 염원을 담아냈을 석장의 발원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제 서궐로 불리는 경희궁으로 넘어간다. 경희궁은 광해군 때 지어졌지만 일제강점기에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건물의 대부분이 헐렸고, 면적도 절반정도로 줄어들어 현재는 정전인 숭정전과 두세 건물만 복원돼 있다. 경희궁에서는 숭정전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동국대학교에서 법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정각원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일제는 경성중학교 설립 시 정전인 숭정전을 1926년 남산기슭(동국대 현 부지에 위치)의 조계사로 옮겨지었고, 1976년 현재 정각원 자리로 다시 옮겨졌다. 이를 동국대학교 법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내부에 어좌 대신 불단을 설치해 불상을 모신 것이다. 경희궁 복원 시 본래 자리로 옮기고자 했으나 변형이 심해서 그대로 두고 경희궁에 새로 지었다. 경희궁의 현재 모습은 일부만 복원돼 불교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1897년 고종이 거처를 옮기면서 본격적인 궁궐의 모습을 갖추게 된 덕수궁은 5대 궁궐 중 가장 작고 배치도 불규칙하며,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 건축이 혼재하고 있다. 고종의 침전인 함령전의 지붕 합각에 만자 문양으로 벽돌이 구성돼 있는 점이 경복궁과 창덕궁의 공통점이다. 석어당과 즉조당 건물에서는 부재의 연결, 부재 고정과 보강 등에 띠철을 사용했는데, 이 띠철에 문양을 넣어 예술적 감흥을 더하고자, 여기에 만자 문양을 넣어 디자인과 벽사의 의미를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좌)고종의 침전인 함령전 지붕 합각에 만자 문양으로 벽돌이 구성돼 있다. (우상)함령전 지붕 합각에 만자 문양이 선명하다.(우하)덕수궁 석어당에 만자 문양의 띠철을 넣어 예술적 감흥을 더했다.

임금의 당가와 불전의 닫집

이와 같이 서울에서 현존하는 5대 궁궐을 다니면서 불교를 느껴볼 수 있는 시각적 대상을 찾아보았다. 궁궐을 모두 다닌 후 가만히 돌아보니 궁궐은 세속의 임금을 모시는 곳이요, 사찰은 법의 왕인 부처님을 모시는 곳이라 무언가 공통점이 건축물에 구체적으로 남아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임금을 모시는 자리인 어좌(또는 어탑)와 부처님을 모시는 자리인 불단이 무척 닮았다. 구조적 유사성은 어좌를 ‘당가(唐家)’로 표현하고, 불좌를 당가의 한글표현인 ‘닫집’으로 부르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닫집은 불단 위 불상의 상부에 목조 처마구조물처럼 장식한 조형물을 말한다. 당가는 닫집의 발전과정상의 한 유형으로 사찰 닫집과 그 형태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궁궐 정전 당가의 형식과 공간구조〉, 박희용) 어좌가 놓일 건축적·구조적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당가에는 좌탑(어좌), 상부 공포, 허주(虛柱, 헛기둥)의 사용 등 불전의 닫집과 무척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당가와 닫집은 ‘집안의 집’ 형태의 독립된 구조물로서 최고의 경외가 표현되는 공간이다.

삼국시대 불전에서는 금당이 중심이었다. 금당 주위를 도는 것으로 예경을 대신했으나 금당 안으로 사람이 들어가 예경하는 방식으로 변화하면서 ‘불전 안 또 하나의 부처님 집’인 닫집을 조성하게 된 것이다. 불전의 닫집은 초기에 불감이나 감실, 장막식 구조에서 출발해 그 형태도 방형·아자형·보궁형·운궁형 등 다양한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이와 달리 궁궐의 당가는 어느 정도 일정한 형식과 규범으로 정착돼 왔다.

추정을 할 수 있는 것은 조선의 궁궐에서 임금의 자리인 당가의 구조가 기존 불전의 닫집 구조를 차용한 것이기에 망정이지 만약 불전의 닫집이 임금의 당가를 흉내 내거나 차용한 것으로 비춰졌다면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불전의 닫집은 존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동국대 정각원(옛 숭정전)에 임금의 어좌를 치우고 그 자리에 불상을 모시자 당가에서 바로 불전의 닫집이 된 것이다.

5대 궁궐안의 주요 전각 임금의 자리에는 모두 당가인 닫집이 자리한다. 억불, 배불의 조선시대 궁궐에도 불교의 색채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어좌의 자리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끝으로 유형문화가 아닌 무형문화에서도 불교는 그 명맥이 이어져 내려온 것을 알 수 있다. 세조 때는 ‘영산회상(불보살)곡’을 아악으로 제정해 종묘제례 등의 공식행사에서 불교음악이 사용되며 이어져 내려왔다. 그리고 불교가 전해지면서 전파된 차문화는 다례의 의식으로 각종 제례에 활용되었고, 외국사신 등을 접견하는 공식행사에서도 이용되었다. 이렇듯 불교문화는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도 유형과 무형의 모습으로 스며들던 것이다.

복원된 경희궁 숭정전에 당가인 닫집이 자리하고 있다.
경복궁 교태전 대들보 중간 부분은 사찰의 금단청처럼 문양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임금의 침전으로 사용했던 덕수궁 즉조당에는 만자 문양의 띠철을 활용해 디자인과 벽사의 의미를 추가했다.
창덕궁 곳곳에서 만자 문양으로 치장된 담장을 찾아볼 수 있다.


최건업
현 아정문화재 대표이사. 서울대학교 농과대학를 다니며 불교학생회 활동을 했다. 동국대 대학원(불교학)에서 철학박사를 취득했고,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외래교수를 맡고 있다. 저서로 <원효의 수행관>·<신찬 신행의범>이 있다. 

글 최건업·사진 정현선 기자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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