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호

〈삽화=박구원>

인터넷 포교 선도자
30년 전 ‘천불동’ 개설해
온·오프라인서 신심 키워

‘천불동(천리안 불교동호회)’이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 한편에서 아스라한 애틋함이 솟아오른다. 부처님오신날에 연등 값을 내며 비빔밥 한 그릇으로 1년치 법연(法緣)을 때우고, 관광지 사찰의 대웅전 앞에서 삼배나 올리고 말았을, 그저 그런 중년 사내를 절 집 안마당으로 이끌어 준 소중한 인연이 바로 ‘천불동’이다. 다만 ‘천불동’에서 기세 좋게 피워 올렸던 젊은 날의 열정과 약속을 오롯이 지켜내지 못한 지금 내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 필자에게 PC통신 ‘천리안 불교동호회 30주년’을 기념하는 특집 코너에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은 형언하기 어려운 감회를 스쳐가게 했다. 잊고 지냈던 법우들의 대화명과 얼굴이 떠오르고,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회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못내 떨치지 못한 아쉬움으로 많은 고민을 했다. 그리고 24년 전 시작한 일을 마무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4년 전 작성한 필자의 석사학위논문은 ‘전자정보공간에서의 종교활동 : 천리안 불교동호회를 중심으로’였다. PC통신을 통해 정보화의 문을 열고, 홈페이지라는 창구를 통해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를 넘나들던, 1990년대 후반 한창 꽃을 피우고 있던 온라인상의 새로운 종교활동을 소개하고 그 미래를 점쳐보던 논문이었다. ‘천불동’의 시작과 발전을 축복했던 그 일의 마지막을 이 글을 통해 정리해보고자 한다.

PC통신, 전화선으로 인터넷 접속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PC통신에 대한 소개부터 간략히 해야겠다. PC통신은 통신회선을 통해 호스트 컴퓨터에 접근해 축적된 정보를 검색하고, 이용자들끼리 메시지나 데이터를 교환할 수 있는 서비스를 지칭한다. 데이콤의 ‘천리안’, 한국PC통신의 ‘하이텔’, 나우콤의 ‘나우누리’, 삼성SDS의 ‘유니텔’ 등은 1990년대를 풍미했던 대표적인 PC통신 서비스이다. 최근에 출시되는 컴퓨터에는 유무선 랜(LAN)카드가 기본으로 장착돼 있고, 전화선과 별도로 제공되는 초고속통신망 서비스로 1초에 최대 10GB의 데이터를 주고받을 수 있지만, 1990년대에는 전화선을 이용해서 초당 1.2~56KB의 데이터를 주고받았다.

1GB는 1KB의 100만 배에 해당한다. 또한 PC통신에 사용하던 모뎀은 전화선을 공유했기 때문에 PC통신을 이용하는 동안은 전화를 쓸 수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PC통신 이용자들은 심야시간에 글을 올리고, 채팅을 해야 했다. 현재를 기준으로 보면 PC통신 시절은 신석기시대쯤으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 그런 PC통신이었지만 당시에는 정보화의 최첨단을 여는 신문물이었다. 고작 1MB의 사진 한 장을 다운받기 위해 몇 십 분을 기다리는 끈기가 필요했고,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회원들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밤을 지새우곤 했다. 채팅 중에 갑작스레 시간과 장소를 잡는 ‘번개’를 여는 열정을 가졌던 정보사회의 얼리어답터(Early-adopter, 신문물을 빨리 사용하는 사람)들이 바로 PC통신 이용자들이었다.

1991년 9월 개설된 불자동아리

‘천불동’은 국내에서 최초로 제공된 상용통신망 ‘천리안’에서 1991년 9월 6일 개설된 불자들의 동호회이다. ‘천불동’을 기점으로 하이텔 불교동호회(하불동), 나우누리 부처님마을(나우부마), 유니텔 부처님나라 등이 개설되었고, 한국전력 내부통신망에도 한전 직원들로 구성된 불교동호회가 만들어졌다. 이들 불교동호회는 게시판과 대화방을 중심으로 하는 온라인 활동, 번개모임과 법회를 중심으로 하는 오프라인 활동을 병행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게시판의 경우는 교리공부 및 수행법 등 불교와 관련된 정보를 공유하는 게시판, 지대방처럼 편안하게 일상적인 생각이나 느낌을 공유하는 게시판이 중심을 이루었다. 대화방은 대체로 회원들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었지만 교리와 각종 신행생활에 대한 토론이나 상담도 심심찮게 이루어지곤 했다. 번개모임은 대부분 친목모임이었고, 동호회 차원에서 기획하는 정기모임은 법회나 사찰순례 등으로 이루어졌다.

‘천불동’은 1994년 첫 여름수련회를 개최했다. 그해 영주 부석사를 시작으로 무주 안국사(1995), 남원 실상사(1996), 논산 안심정사(1997) 등에서 수련회를 개최했는데, 자체적으로 준비한 독특한 주제를 정해두고 있었다. 안국사 수련회는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주제로 정했다. 눈을 가리고 서로의 손을 잡은 채 안국사를 품고 있는 적상산을 포행하면서 ‘우리’의 소중함을 체험할 수 있었다. 실상사에서는 ‘시대에 발맞추는 불교’라는 주제로 자본주의와 정보사회를 살아가는 불자들의 삶의 자세에 대해 토론했다. 또 안심정사에서는 미륵신앙에 대한 세미나를 열고 익산 지역의 미륵신앙 유적을 답사했다. 당시 송광사나 해인사 등 유서 깊은 사찰에서 진행하던 수련회가 사찰에서 준비한 신행 중심의 수련회인데 비해 천불동의 수련회는 자체적으로 준비하고, 불교와 사회의 관계를 고민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 모습을 보였다.

‘천불동’의 활동 중에서 ‘보은회’라는 주목할 만한 소모임이 하나 있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은혜를 갚는다.’는 취지로 결성된 보은회는 매월 회비를 모아 불서 보내기, 이웃돕기 등 나눔활동을 실천했는데, 그 중에서도 점자 인쇄를 위한 사경 활동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사실 천불동은 게시판을 통해 ‘전자 사경’이라는 새로운 신행활동을 실험했었다. 회원들이 순서를 정해 특정한 경전의 내용을 게시판에 릴레이 형식으로 올리는 방식이었는데, 당시 조계사와 인연이 있던 회원의 제안에 따라 입력된 경전을 파일로 저장해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인쇄물을 만드는 단체에 전달하는 활동으로 발전한 것이다.

당시 ‘천불동’의 활동은 20~30대 청년불자들의 적극적인 참여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또한 초발심자들을 위해 교리와 수행 등 불교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바쁜 사회생활로 인해 사찰에 가기 힘든 이들에게 신행활동을 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정보사회를 준비하는 불교계에 새로운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1997년 고창 선운사에서 가진 정기모임에 참석한 회원들.

패러다임 변화에 사이트 독자 구축

그러나 불교계의 미래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했던 PC통신 불교동호회는 급격한 기술변화를 따라가는데 실패했다. PC통신은 여러 가지 제약으로 인해 텍스트를 기반으로 하는 온라인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초고속통신망 구축이 정책적으로 추진되면서, 데이터통신의 패러다임이 PC통신에서 멀티미디어를 중심으로 하는 인터넷으로 변화했고, 불교동호회들은 자체적으로 웹사이트를 구축하거나 포털사이트의 ‘카페’ 서비스로 옮겨가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이때 대부분의 불교동호회들은 카페로 전환했으나, ‘천불동’은 또다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자체적으로 서버를 마련하고, 독자적인 웹사이트(buddhasite.net)를 구축한 것이다. 이런 결정을 내린 데에는 서울외곽순환도로 사패산 터널공사 반대운동이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시공을 맡았던 건설회사는 천리안을 서비스하던 LG그룹의 계열사였다. 그런 이유로 천불동은 반대운동을 주도했던 불교계의 움직임에 동참했고, 통신망을 서비스하는 회사에 좌우되지 않고 자율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서버 및 웹사이트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했다. 최초의 PC통신 불교동호회로서 상용망이 아닌 고유의 서버와 웹사이트를 통해 인터넷 시대를 선도하려는 계획이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자 하는 의지는 높이 평가해야겠지만, 현실적으로 ‘동호회’의 한계를 절감하는 선택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20~30대의 청년불자들은 기성세대로 편입되면서 활력을 잃었고, 어렵게 구축한 웹사이트는 대형 포털사이트에 묶인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잊혀졌다. 기업사이트였다면 포털에 광고라도 했겠지만, ‘동호회’는 그럴 여력이 없었다.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IT기술도 비전문가들이 따라잡기에는 너무 버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천불동은 한동안 명맥을 유지했다.

사이버 불교자료실로 큰 역할

그것은 천불동이 단순한 동호회가 아니라 불교 데이터베이스로서도 탁월한 기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천불동의 역사는 온라인상에서 불교 자료를 축적하고, 공유하는 데이터베이스 구축의 역사이기도 했다. ‘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이 일반화되기 전까지 불교와 관련된 각종 학술자료, 주요 경전 등의 파일은 천불동의 ‘장경각(자료실)’에 모여 있었다.

‘활동운화’라는 대화명을 썼던 회원의 헌신으로 가능했던 천불동 장경각은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불교에 관한 정보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했다. ‘천불동’이 인터넷으로 터전을 옮긴 이후 커뮤니티 기능이 점차 퇴화하던 동안에도 장경각 서비스에 대한 수요는 지속되었다. 그렇지만 각종 학술정보를 온라인으로 서비스하는 기업이 등장하고, 저작권법의 시행이 본격화되면서 장경각 서비스도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제한된 지면으로 인해 세세히 밝히기는 어렵지만 천불동이 써온 역사는 새로운 시대를 돌파하려는 불교의 몸짓이었다. PC통신이라는 새로운 기술은 한국사회가 처음으로 경험하는 시대적 환경이었다. 그 안에서 천불동 회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르며, 불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찾아냈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극복해 불자 상호간에 소통했고, 새로운 신행방법을 고민했다. 인터넷 시대로 접어들면서 PC통신 동호회는 인터넷 커뮤니티(카페)로 전환되었지만, ‘천불동’은 기술·경제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서버 및 웹사이트 구축이라는 길을 열었다.

그 이후 전개되고 있는 SNS 시대는 동호회라는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이 중심이 되는 시대이다. 게시판에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입력하고, 그 글을 감사하며 읽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누군가 올린 글이나 기사의 링크를 공유하고, 인공지능이 추천하는 동영상을 시청한다. 인사말을 입력하기보다는 ‘좋아요’를 클릭하고, 굳이 무엇인가를 함께 하려고 하지 않는다. 개인화된 시대의 시절 인연을 과거의 잣대로 탓할 생각은 없다. 그저 그렇게 바뀌었음을 지적한 것뿐이다.

‘천불동’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 30년이 되는 지금, PC통신 ‘천불동’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서버는 남아 있지만 인터넷 ‘천불동’도 더는 접속할 수 없다. 솔직히 PC 기반 인터넷을 따라가기도 버거웠던 PC통신 ‘천불동’의 회원들이 모바일 기술을 따라잡는다는 것은 난망한 일이다. 그래서 ‘천불동’을 다시 오픈할 수 있다고 감히 고할 수 없다. 이제 구참(舊參)이 되어버린 ‘천불동’ 회원들은 공동체에서 개인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가는 시대적 흐름을 돌파하는 방법을 아직까지 못 찾고 있다. 그래도 언젠가, 누군가가 어떤 모습일지는 모르지만 ‘천불동’의 문을 다시 열어주기를 기대한다. 누군가가 그 길을 열고자 한다면 아마도 ‘천불동’의 구참들은 그에게 힘을 모아줄 것이다.

〈삽화=박구원>

키보드로 짓는 口業, 큰 惡業

마지막으로 사이버공간 속에서 30년을 지내며 얻은 작은 깨달음을 나누고자 한다. 하나는 ‘악플(게시물에 다는 나쁜 꼬리말)’에 대한 것이다. 사이버공간에서 나와 남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악플이다. 이른바 키보드로 짓는 ‘구업(口業)’이다. 그런데 말은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생각이 말로 전해지는 것이니 ‘의업(意業)’이기도 하다. 또한 생각과 말은 행동을 촉발하는 중요한 기제가 된다. 생각한 대로 행동하고, 말이 씨가 되어 행동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이는 곧 신업(身業)과 직결됨을 의미한다. 이렇게 생각과 말과 행동은 피드백을 통해 서로를 강화하는 효과가 있다. 자기가 한 말이나 행동 때문에 더 강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자기 생각을 더욱 확신하게 되며, 더욱 적극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악플은 말로 짓는 악업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 모두에 걸쳐서 악업을 짓는 동시에, 악업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악순환의 발단이 되는 것이다. 불교의 업설은 ‘업에는 과보가 필연적으로 수반된다.’고 가르치며, 그 바탕 위에서 ‘악업을 소멸하고 선업을 증장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무심코 올린 악플 하나는 상대방에게 괴로움만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옭아매는 악업의 사슬도 된다. 폭력적 언어 사용을 지양하고, 좋은 말을 하는 것이 곧 업장을 소멸하고 복덕을 짓는 구도이자 수행임을 깨달아야 한다.

다른 하나는 정보에 대한 편식에 관한 것이다. 요즘 인터넷에 인공지능 기술이 결합하면서 특정 콘텐츠를 소비하면 그와 연관성이 높은 다른 콘텐츠들이 우선적으로 추천되고 있다. 이를 아무 생각 없이 수용하면 한쪽으로 치우친 정보를 주로 소비하는 편향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편향된 정보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실상을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특히 혐오로 가득한 편향된 정보를 무의식적으로 소비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된다. 혐오는 편을 가르고 상대편에게 고통을 가중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악업이다. 동시에 혐오에는 혐오의 대상이 되는 존재에 대한 비뚤어진 욕망이 내재해 있다. 차별하고 무시하고 배제함으로써 혐오의 대상보다 우월한 지위를 갖겠다는 탐심(貪心, 욕심)이 밑바탕에 깔린 것이다. 혐오는 상당 부분 대상에 대한 분노 표출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분심(憤心)이 강하게 배어 있고, 혐오 대상에 대한 편견을 고착시킨다는 점에서 치심(癡心, 어리석음)과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불교적 관점에서 혐오는 삼독(三毒)을 심화시키는 행위이다. 삼독은 열반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는 근본적인 번뇌이다. 결국 혐오는 번뇌 망상을 떨치는 것이 아니라 번뇌의 불구덩이로 자기 자신을 밀어 넣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악플이나 편향된 정보, 혐오 등은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수행에 장애가 되는 마군(魔軍)이고, 이들을 뿌리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 마군이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걸 인터넷 사용자들은 명심해야 한다.

박수호 ― 현 중앙승가대학교 불교사회학부 조교수. 고려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불교와 관련된 사회학적 연구 주제를 발굴함으로써 불교사회학의 지평을 확장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는 포스트휴먼 사회와 불교, 불교의 사회적 책임 등으로 연구 관심을 넓히고 있다.

PC통신 ‘천불동’ 회원 ➊
― 박희준 씨(59, 희우법률세무사무소 변호사)

“천불동 장경각은
거대한 사이버 불사”

1991년 9월 경, 데이콤㈜(현 LG)에서 운영하던 PC통신 서버에 ‘천리안불교동호회’가 만들어졌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이기석 씨와 반야 스님(또는 ‘해물탕 스님’)이란 아이디를 쓰던 한 스님이 함께 만드신 것으로 기억한다.

천불동의 초창기 멤버로 가입했던 나는 회원들과 다채로운 추억을 쌓아올렸다. 함께 수련대회도 가고, 채팅방을 통해 불교에 대한 이야기나 자료를 공유했다. 이렇게 나눈 대화는 수행이나 불교공부에도 많은 도움이 됐다. 당시 학승이셨던 해인사의 원창 스님과도 인연을 맺어 많은 도움을 받았고, 때로는 해인사에 방문해 차담을 나누기도 했다.

또 천불동 내 소모임에서 진행한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책을 제작할 때, 필요한 파일을 입력하는 봉사도 했다. 어떤 회원과는 “부처님이 인도가 아니라, 알래스카에서 태어나셨어도 육식을 금지했을까?”하며 어설프지만 제법 원초적인 토론을 나눈 기억도 난다.

당시 대학원을 다니던 박수호(중앙승가대 교수) 씨는 시샵으로 활동하면서 다른 PC통신사의 불교동호회와 연합모임을 시도하는 등 통신을 이용한 불교포교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이후 인터넷망 보급과 함께 PC통신을 제공하던 회사들이 문을 닫았고, 천불동도 인터넷 웹사이트로 자리를 옮겼다. 전적으로 ‘활동운화’라는 아이디로 활동했던 이승훈 회원의 울력으로 이룬 거대한 사이버 불사(佛事)였다.

그는 ‘자비송’이라는 노래를 국내에 처음 소개했고, 특히 천불동의 자랑이던 장경각의 자료는 그가 전 세계의 불교관련 사이트에서 모아 직접 정리해 올린 것들이었다.

다양한 활동과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학승·학자를 비롯해 불자들의 소통창구가 됐던 천불동도 시절인연이 다해 폐쇄되면서 천불동 회원들의 공식적인 모임창구도 사실상 사라지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해도 진한 아쉬움과 함께 그리움이 남는다.

PC통신 ‘천불동’ 회원 ➋
― 심준엽 씨(52, 쌍용자동차 근무)

“띠별모임 번개에서
지금의 아내 만나”

1997년 봄, 그날은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하는 하루다. 그날은 첫 입사한 회사에서 대리로 진급한 날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저녁에 천불동 내 소모임인 띠별모임 번개(벙개, 채팅으로 교류하던 사람들이 갑작스레 개최한 모임)를 한 날이었다. 이 모임이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하는 하루인 까닭은 그 자리에서 지금의 아내를 처음 만났기 때문이다. 약속장소에 조금 늦게 도착했을 때, 익숙한 얼굴들 사이로 아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온·오프라인을 통해 호감을 키워갔고,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개최된 서울 연등축제 때 연인이 되었다. 그리고 결혼을 했고, 자녀까지 얻었다. 내가 이렇게 행복한 삶을 살게 된 것은 부처님의 자비이자 천불동이 내게 준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한다.

나는 박수호 교수에 이어 천불동 시샵을 맡았다. 이때 역대 시샵들이 사용했던 목탁에 금이 가서 새 목탁을 마련해야 했다. 장모님께서는 목탁을 오래도록 사용하라며 손수 들기름을 바르고 말리는 작업을 몇 번이나 해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처럼 눈에 띄지 않는 정성이 천불동의 밑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천불동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던 중, 한 번은 도법 스님(인드라망생명공동체 상임대표)이 주지로 계셨던 남원 실상사 순례를 갔다. 실상사에 머물던 중 화엄학림의 한 스님이 “같이 축구한 번 할까요?”하고 제안했다. 군대에서의 경험으로 나름 축구와 족구에 일가견이 있던 우리는 ‘공부만 하시는 스님들이 축구를 얼마나 잘하시겠느냐?’며 자신만만하게 붙었는데, 속수무책으로 패배했다.

아쉬운 마음에 “스님들이 공부는 안하시고 축구와 족구만 하시느냐?”며 볼멘소리를 했지만, 스님들은 “공부를 하면서도 체력유지를 위해 늘 몸을 단련한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천불동 창립 30주년을 맞아 흩어져있던 기억의 퍼즐조각을 하나 둘 맞춰보니 감회가 남다르다. 나의 20대 추억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 천불동, 그 시절 우리의 모습이 그립다.

PC통신 ‘천불동’ 회원 ➌
― 박상지 씨(43, 조계종총무원 행정관)

“점자 경전 봉사활동
가슴 따뜻해지는 추억”

우리 때는 ‘시샵’이라는 말이 있었다. 처음 듣는 사람은 ‘불어인가?’라고 생각할 만큼 생경한 단어지만, PC통신 시절에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에게는 추억을 소환하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집 전화기와 연결된 모뎀에서 들리는 ‘삐- 삐-’하는 소리와 함께 서버에 접속하면, 파란 화면 안에 ‘방가 방가!’하며 맞아주는 천불동 회원들이 있었다. PC통신으로 접속하면 집 전화가 ‘통화 중’ 상태가 되어 중요한 전화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회원들은 주로 늦은 저녁이나 새벽에 활동했다.

나 역시 늦은 새벽까지 천불동 회원들과 ‘불교’를 주제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밤늦도록 이어지는 회원들과의 대화는 무척이나 신나는 일이었다. 학교동아리 모임보다 더 끈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지만, 전화요금고지서를 보고 놀란 부모님은 크게 꾸지람을 하곤 했다.

규모가 큰 만큼 천불동 내에서는 띠별 모임·경전공부 모임·사찰순례 모임 등 다양한 소모임이 활성화 돼 있었다. 또 전국 정모(정기모임)가 열리는 날에는 각지에서 사람들이 예고된 장소로 모여 예불·사찰순례 등을 진행했는데, 그 규모가 대학교 MT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천불동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추억을 쌓았다. 특히 시각장애인이 경전을 읽을 수 있도록 점자(點字)화 봉사활동을 했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추억이다. 또 온라인 수계법회를 진행하면서 ‘부처님 법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하며 논의했던 일,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들고 회원들과 남도여행을 떠났던 일 등 여러 추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요즘에도 몇몇 천불동 회원과 만나 불교에 대해 얘기를 나누곤 한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불심과 열정으로 가득 찼던 법우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시절인연이 다해 오래도록 이어지지 못한 법우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오늘도 좋은날’을 만들어 나가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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