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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가 본 세상살이5_ 새로운 시대의 불교윤리

기사승인 2021.09.27  14:5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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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생명복제 등 시대적 문제
율장의 적극적인 해석 통해
사회적 대안으로 제시해야

코로나19로 어수선한 세상에서 우리는 미래에 관한 생각과 꿈을 상당 부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루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도 제대로 일할 수 없는 경우에는 미래에 대한 막막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그 가운데 들려오는 일부 정치인들의 막말과 사회지도층에 속한다는 사람들의 파렴치한 언동은 말 그대로 짜증과 함께 우리 사회의 ‘윤리적 타락상’을 온몸으로 느끼게 하는 계기를 지속적으로 제공한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이런 ‘윤리적 타락상’ 속에는 ‘정말 윤리적으로 타락한 것인지’, 아니면 그런 판단을 내리는 ‘우리가 시대에 뒤떨어진 기준을 가져서인지’하는 혼란이 뒤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동성애나 인공지능(AI)과 관련된 윤리 문제를 판단하고자 할 때도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온전한 신체와 뚜렷한 성 정체성을 수행자의 조건으로 내세워왔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동성애자가 수행자가 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면 혼란과 갈등이 생겨날 수 있다. 인공지능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마음에 위안을 주는 인공지능을 장착한 로봇이 우리 삶 가까이로 다가오면서, 그것과 형성하는 관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윤리적 관점이 요구되고 있다.

이 시대, 불교윤리란 무엇일까?

불교를 기반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 즉 불자들은 당연히 불교에 토대를 둔 철학과 윤리관 속에 살겠다는 염원을 지니게 된다. 그 염원을 바탕으로 가까운 절에 가서 108배를 하거나, 경전 공부하는 곳을 찾아가 열심히 귀를 기울여보기도 한다. 오래된 계율 중에 ‘법문을 설하는 곳이 있으면 가서 들어라.’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법문을 듣는 게 불자로 살아가는 요건 중 하나임을 새삼 깨닫는다. 요즘에는 온라인 법회를 개최하는 사이버 법당도 많아져 반드시 사찰에 가서 듣지 않아도 되니 참 편리해졌다.

그러다 간혹 불교계를 둘러싼 좋지 않은 이야기들이 언론에 떠도는 것을 보고 실망해 공부에 게을러지기도 한다. 물론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바르게 살아가는 출·재가들을 만날 때도 있다. 그런 순간에는 자신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고 ‘공부와 수행에 더 마음을 내야겠다.’고 다짐을 하곤 한다. 우리는 이런 일상의 여러 일화를 접하면서 붓다가 발견한 “삶의 심층에서는 연기의 법칙이 작동한다.”는 진리를 떠올린다. 이 진리의 가르침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윤리적 답변을 포함한다.

붓다는 “모든 존재는 타자와의 의존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의존 양상이 바뀌면서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초기경전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스승님께서 발견한 진리가 무엇입니까?”하고 계속해서 묻는 제자들에게 “이미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대답하면서도 “모든 형성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라고 또 한 번 말한다. 이 명제는 붓다가 세상과 자연,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여 찾아낸 진리의 핵심이다.

불교윤리는 이렇게 붓다가 발견한 진리에 따라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 그 자체이고, 더 나아가 그 열망을 일상 속에서 실천해야 함[行]의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불교윤리는 율장의 구체적인 계율들을 토대로 삼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붓다의 핵심 가르침에 근거해서 넘어설 수도 있는 열린 윤리라고 말할 수 있다.(박병기 〈의미의 시대와 불교윤리〉, 씨아이알, 2013, p.168) 역사적인 붓다의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인터넷 기반의 가상공간이나 인공지능을 장착한 로봇, 배아복제를 통한 인간생명 복제의 가능성 등의 새로운 문제는 율장의 자구(字句)에만 매달려서는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그 계율들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이 요구되고, 그 근거는 당연히 붓다가 발견한 진리여야 한다.

‘인공지능’, ‘동성애’ 등 새로운 시대에 변화하는 윤리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율장을 토대로 삼으면서 붓다의 가르침[진리] 에 근거해 계율을 넘어설 수 있는 ‘열린 불교윤리’에 그 답이 있지 않을까?

우리 사회의 윤리와 불교윤리

우리 사회에서 불교는 독특한 위상을 차지한다. 불교는 1,700년 이상 이 땅의 백성들과 함께해온 역사와 함께, 21세기 초반 한국사회를 대표하는 제도종교 중 하나로 살아있기도 하다. 기독교와 가톨릭을 아우르는 그리스도교에 우선권을 내주었지만, 그럼에도 삶과 문화 전반에 걸쳐 불교가 차지하는 위상까지 더하면 결코 약하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의 사회에서 제도종교는 대체로 두 가지 역할을 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받는다. 첫째는 죽음으로 상징되는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확실한 체계 속에서 감당해줄 것이라는 기대이고, 둘째는 그런 역할과의 관련 속에서 그 사회의 도덕성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이다. 우리 사회의 두 제도종교인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그런 기대에 얼마나 부합하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이 물음에 긍정적인 답변을 보내기는 어렵다. 오히려 일부 극단적인 기독교 세력의 신앙 활동과 그들을 이끄는 일부 목회자들의 부도덕성과 파렴치함이 더 부각되어 있을 정도다. 불교는 그에 비하면 사정이 낫지만,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일부 승려들의 일탈로 도덕적 나침반이 될 수 있겠다는 기대를 모으지는 못하고 있다. 거꾸로 ‘사회가 종교를 걱정하는’ 세태가 일상화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우리 사회가 종교를 제대로 걱정할 수 있을 만큼의 도덕성을 확보한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는 20세기 중반 이후 세계사에서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뤄낸 특별한 역사적 사례로 꼽힌다. 최소한 외형적인 성장과 형식적인 민주화에는 자부심을 느낄 만큼 성공했다. 그러나 그 성장 속에 자리 잡은 불평등과 부동산 투기 등 산업화 이면에 짙게 드리운 그림자는 젊은이들을 절망으로 내몰고 있고, 민주주의 속 공론의 장 형성을 방해하는 시민윤리의 부재는 의견이 다른 사람을 손쉽게 악마화하면서 적대적인 벽을 쌓아가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불교윤리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새로운 시대의 불교윤리 모색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고 한다면,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생활을 버리고 부처님 가르침대로 생각하고 또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 종교도 마찬가지지요. 오히려 내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살길을 열어주는 것이 진정한 종교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종교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지 다른 종교를 믿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우긴다면 문제가 큽니다. 불교는 일체법(一切法)이 개시불법(皆是佛法), 즉 모든 것이 불교 아닌 것이 없다고 선언합니다.”(성철, ‘지혜와 빛의 말씀’ 〈고경〉 100호, 성철사상연구원, 2021.8. pp.50-51)

“만족할 줄 알아서 남이 공양하기 쉬워야 하고, 분주하지 않고 생활이 검소하며 몸과 마음이 슬기로우니, 가정에서 무모하거나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전재성 역주 〈숫타니파타〉. 2015, p.488)

현대 한국을 대표하는 선승으로 평가받는 성철 스님(性徹, 1912~1993)의 불교윤리와 종교관을 엿볼 수 있는 첫 번째 인용문과, 〈숫타니파타〉에서 불교적 삶의 모습을 설명하는 두 번째 인용문을 대조해보면 불교윤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보다 명료한 답을 얻을 수 있다. 불교윤리적인 삶은 자신의 생각과 생활을 버리고 붓다의 가르침대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부담 없이 밥 한 끼라도 대접할 수 있는 친절과 무집착의 삶의 자세, 그 자체이다. 또한 불교가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제도종교 중 하나임을 감안하면, 불교윤리는 ‘내 말을 듣지 않는 사람에게도 살길을 열어주는 것’이어야 하고,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의 핵심 종교윤리로 자리 잡아 마땅하다. 필자가 불교공부 과정에서 만난 스승 가산지관 스님은 불교의 포용성을 ‘불교에는 개종(改宗)이 있을 수 없다.’는 명제로 표현하곤 했다.

그에 비해 유대민족의 폐쇄적인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보편적인 윤리를 제안하고자 했던 예수의 그리스도교는 최소한 현재 우리 사회에서 바람직한 종교윤리를 확보하지 못함으로써 ‘분열과 갈등의 씨앗이 되고 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성경〉 무오류주의와 구원에 대한 배타적인 집착 등이 기독교계의 중심축을 차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종교간 대화와 공존을 지속적으로 모색하는 기독교인들이 소수파나 이단으로 내몰리는 비극까지 생겨나고 있다.

불교윤리는 우리 사회의 종교윤리, 더 나아가 시민윤리를 정립시키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두 가지 장점을 지녔다. 하나는 위의 인용에서 살펴볼 수 있는 ‘모든 것이 불교 아닌 것이 없다.’는 교리적 포용성이고, 다른 하나는 붓다가 진리를 새롭게 발명한 것이 아니라 명상과 관찰을 통해 발견한 것이라는 자연주의적 방법론이다. 후자의 경우는 불교 안에 포함된 윤회와 같은 교리를 괄호 속에 넣더라도 그 자체로 충분한 철학과 윤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미국 듀크대학의 심리철학자 오웬 플래나간(Owen Flanagan)도 바로 이 두 번째 특성에 주목하면서 ‘보살의 뇌’라는 관점에서 불교철학과 윤리를 찾고자 했다. 그는 ‘불교도가 되지 않고도 불교적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불교철학 공부와 불교윤리적 행위를 통해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오웬 플래나간, 박병기·이윤주 옮김 〈보살의 뇌〉, 씨아이알, 2021) 이런 주장은 우리가 마주한 새로운 시대와 불교윤리의 만남 가능성과 필요성을 부각시키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불교의 시간관에 따르면 현재와 분리된 미래, 즉 새로운 시대란 존재할 수 없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찰나의 이 순간뿐이고, 그마저도 우리는 그 찰나에 온전히 머물 수 없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간의 축 위를 걸을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지금 이 순간과 공간을 배제한 채 미래에 관해 논의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행동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미래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그 대신 세상에 떠도는 허망한 미래 담론에는 일정한 비판의식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은 인터넷 기반의 정보혁명인 3차 산업혁명과 분리되지 않는 허약한 개념임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마치 대단히 새로운 시대를 맞은 듯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새끼줄’로 작동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가 현재 우리의 의식과 행위의 결과로 다가오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불교윤리적 전제를 받아들이고, ‘우리는 다른 존재와의 의존 속에서만 비로소 존재한다.’는 붓다의 가르침을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다면, 로봇이나 동성애자와의 만남과 같은 새로운 관계 상황 또한 당황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그 만남의 과정에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의 지혜와 그 대상과 나를 분리시키지 않는 동체인식(同體認識)에 기반을 둔 자비행이라는 불교윤리의 두 핵심 개념만 붙들고 있으면 된다.

코로나19라는, 이제는 조금 익숙해지기도 한 대상과의 만남에서도 마찬가지의 지혜와 자비행이 요구되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 새로운 바이러스는 우리가 자연을 분리시켜 무자비하게 대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새로운 존재인 동시에 기존의 우리 일상을 바꾸지 않으면 그들이 우리의 삶 자체를 멈추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역행보살’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본다면 새로운 시대 불교윤리의 출발은 지금 이 순간, 내가 발 딛고 있는 땅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자 하는 일상의 명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박병기 ― 현 한국교원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전주교육대학교 교수와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장 역임, 현재 교육부 민주시민교육자문위원장, 계간 〈불교평론〉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왜 지금 동양철학을 만나야 할까〉·〈의미의 시대와 불교윤리〉 등이 있다.

글 박병기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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