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호

<삽화=전병준>

사랑방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몰려든 마을 사람들로 가득 차곤 했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이야기는 지난 호에 소개한 ‘도깨비’ 이야기와 함께 내 인생에 깊은 영향을 준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옛날 체구 장대하고 힘세면서도 착하고 지혜로운 남자가 무과(武科) 시험에 응시하려고, 한양(서울)을 향해 길을 나섰다. 괘나리 봇짐을 짊어지고 신 들메(신발이 벗겨지지 않게 동여매는 끈) 단단히 하고,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부지런히 걸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들판을 휘질러갔다.

그 남자는 힘이 넘칠 뿐 아니라 칼 쓰기, 창 쓰기, 말 타기, 수박치기 등 못하는 것이 없었다. 배포도 두둑했고, 용기와 의협심도 대단했으며, 병법서를 읽었으므로 세상을 뚫어보고 경영하는 지혜도 남달랐다.

강을 건너고 산을 넘고 깊은 숲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었다. 남자는 몸이 지쳤고, 배가 고팠고, 다리가 팍팍했다. 여우가 울고, 부엉이가 으스스하게 울었으므로, 그는 서둘러 인가를 찾아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멀지 않은 곳에 불빛이 반짝거렸으므로 그곳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거대한 기와집의 솟을대문 앞에 이르렀는데, 대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남자는 대문을 두들기면서 “여봐라! 아무도 없느냐!”하고 소리쳤다. 거듭 두들기고 소리치고 한참을 기다렸을 때에야 문이 열렸다. 길게 머리를 땋아 늘인, 과년해보이지만 어여쁜 처녀가 초롱불을 들고 나와 깊이 잠긴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집에서는 묵어가실 수 없는 끽긴한(매우 중요한) 사정이 있습니다. 빨리 재를 넘어 다른 인가를 찾아가십시오.”

남자는 대문간에서라도 묵어가게 해달라고 통사정을 하며 억지를 썼지만 처녀는 잘라 말했다.

“우리 집에서 묵게 되면 손님의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어서 가십시오.”

남자가 처녀 앞으로 한 발 다가서며 말했다.

“보다시피 저는 힘이 장사이고, 몸이 비호같이 날쌔고, 무술도 뛰어납니다. 두려울 것이 없으니 들어가서 하룻밤 신세 지고 가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처녀는 마지못해 남자를 안으로 들였다.

들어가 보니 어마어마한 부잣집이었다. 안채인 사간 겹집은 으리으리했고, 중문 밖의 사랑채와 아랫것들이 거처하는 문간채가 여럿 있었고, 큼지막한 장독대와 곡간과 귀중한 살림살이를 저장하는 광도 드넓어 보였다.

한데 집안에는 처녀가 혼자 있을 뿐, 귀신이 나올 것처럼 조용했고, 으스스 음습했다. 처녀는 말없이 부엌으로 들어가 저녁밥을 지었고, 안채 마루에 상을 차려 내다주었다.

남자가 밥을 다 먹고 나자 처녀가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앉아 말했다.

“저의 집은 선조대대로 내려오는 양반 가문입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에 오라비가 둘, 올케도 둘이 있었습니다. 또 문간채에 네 쌍의 젊은 종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두 달 전부터 한밤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하나 나타나 종들부터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죽어가게 했고, 그 시신을 어디론가 옮겨 갔습니다. 이어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오라비와 올케들을 차례로 다 죽게 됐고, 오늘은 마지막으로 제가 죽게 될 차례입니다. 어쩌면 손님이 오셨으므로 괴물은 저를 젖혀두고 낯선 손님을 먼저 죽게 할지도 모릅니다.”

남자는 그 괴물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물었고, 처녀가 대답했다.

“저는 방안에 숨어 오들오들 떨면서 창구멍으로 내다보았는데, 괴물은 까맸는데, 거대한 사람형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황금색깔 머리에 두 개의 황금색 뿔이 났고, 온몸에 금빛 털이 돋아 있고, 눈에서 이글이글 금빛 화광이 솟고, 걸으면 쩔그렁쩔그렁 쇳소리가 나고, 오래되어 곰팡이가 슨 금붙이의 냄새가 풍겨왔습니다.”

남자는 마음에 짚이는 것이 있어, 처녀에게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밤에는 아무 걱정 마시고 아가씨 방에 들어가 자리를 펴고 마음 놓고 주무십시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몇 가지 조처를 하기 시작했다. 나무로 된 절구통을 들어다가 마당 한가운데 놓고 끌과 망치로 밑구멍을 뚫었다. 뒤란 대밭에서 대 한 그루를 베어다가 한 길 남짓한 대롱 하나를 만들었다. 그 대롱을 절구통 밑구멍에 끼웠다. 절구통 안에 숯을 담고 불을 피웠다. 불 위에 잎담배 한 가닥을 얹었다. 남자는 절구통 옆에 멍석을 깔고, 목침을 베고 누워 대롱 끝을 뻐끔뻐끔 빨았다. 담배 연기가 마당 안에 퍼졌다.

자정이 되자 어둠에 잠긴 광 안쪽에서 으스스한 회오리바람이 일어나고,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마당 안을 둘러 살피고 어정거리던 괴물은 절구통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거구의 남자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이때 담배 연기를 뻐끔뻐끔 빨아 뿜고 있던 남자가 근엄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삽화=전병준>

“이리 요란스럽게 구는 네놈의 정체는 무엇이냐!”

괴물이 남자 머리맡으로 다가가 두 손을 짚고 엎드리면서, 울려나오는 듯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르신, 저로 말할 것 같으면 광 안에 뿌리를 두고 있는 금괴의 정령이옵니다.”

남자가 소리쳐 말했다.

“광에 뿌리를 두고 있는 금괴의 정령이라니? 그 시말(始末)을 알아듣기 쉽게 자세히 말해보아라.”

괴물이 감격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네. 장사 어르신, 모든 것을 아뢰겠습니다. 이백오십 년 전에 이 집 선대의 한 어른이 중국지방, 여송(필리핀)지방, 유구(오키나와)지방과 무역을 크게 했는데, 돈을 아주 많이 번 그 어른은 금괴를 실어다가 은밀하게 이 집의 광 바닥에 깊이 묻어놓았습니다. 장차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광에 금괴를 묻는 작업을 한 머슴이 그것을 발설하거나 훔쳐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그 머슴을 죽여 없앴습니다. 그랬는데, 그 어른은 자식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금괴 묻힌 사실을 유언해주지 않고 급사했으므로 저는 영영 햇빛을 볼 수 없게 되었고, 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저는 바람을 쐬고 싶어 미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저는 이렇게 괴상스러운 형상을 하고 세상으로 나와 사람들을 붙잡고 제발 바람을 쐬게 해달라고 통사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자가 큰 소리로 꾸짖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지금껏 너는 이 집안의 수많은 사람을 죽어가게 했단 말이냐?”

괴물이 세차게 도리질을 하며 말했다.

“나으리, 제발 저의 충심을 알아주십시오. 저는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해치고저 하지 않았습니다. 깊이 묻혀 있는 저를 꺼내 바람을 쐬게 해달라고 통사정하려고 사람들에게 접근하곤 했는데, 제가 다가가기만 하면 그 사람이 기절초풍하여 죽어버리곤 했습니다.”

남자가 다짐을 받았다.

“진정 너의 말이 사실이렷다?”

괴물이 말했다.

“절대로, 거짓말이 아닌 사실이옵니다. 제발 한시라도 빨리 광의 동쪽 구석 바닥을 두 자쯤 파헤치고 저의 가엾은 살붙이들을 모두 꺼내 바람을 쐬게 해주십시오. 저는 이 세상을 휘휘 돌아다니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좋은 일을 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저를 필요로 하는 불쌍한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괴물은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남자는 처녀와 함께 촛불을 밝혀 들고 광으로 갔다. 괭이로 바닥을 파자 싯누런 금괴가 다섯 가마니나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황금의 주인인 처녀에게 황금 정령의 간절한 뜻을 말했고, 처녀는 남자에게 그 황금을 처리하는 일을 일임하겠다고 말했다.

이튿날 그는 처녀와 더불어 그것을 한양으로 싣고 갔고, 그것을 임금에게 바치며 그것을 얻게 된 내력을 말한 다음, 금괴의 정령의 뜻에 따라 세상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기를 청했다.

임금은 금괴를 팔아 세상의 가난을 구제하고, 담력 대단한 그 남자를 야전군 대장으로 삼고, 그와 처녀가 부부의 인연을 맺고 살도록 해주었다.

할아버지는 이야기를 이렇게 끝맺었다. 내 나이 여든이 넘은 지금 생각해보니,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우리 할아버지는 손자인 나를 품에 끼고 자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어 시인 · 소설가로 키웠지만,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금괴를 광 속에 묻어둔 그 어떤 할아버지는 그 금괴로 인하여 멸문의 화를 당하게 하였다.

이야기를 마친 다음 할아버지는 이렇게 가르치셨다.

“돈은 칼하고 같은 것이다. 대장장이가 만든 칼을 아낙들이 손에 들면 좋은 요리를 하게 되지만, 강도가 손에 들면 도둑질을 하거나 살인을 하게 된다. 돈이란 것은,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좋은 데 쓰이지만, 탐욕 많고 음흉한 일을 꾸미려 하는 사람 손에 들어가면 세상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데 쓰인다. 무식하고 마음씨 곱지 않고 인정이 메마른 사람이 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암세포처럼 세상을 병들게 하고 썩어가게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흘러야 한다. 물도 흘러야 하고 돈도 흘러야 한다. 그것은 넉넉하게 가지고 있는 부자들에게로 흘러가면 안 되고, 아래쪽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흘러가야 한다. 돈이 가난한 자들에게로 흘러 잘 쓰이면 세상이 화평해지지만, 불량한 부자의 돈궤에 뭉쳐 쌓여 있으면 결국 썩어 독이 되는 것이고, 세상을 더럽고 흉악하게 하게 된다. 모든 것을 나누어야 한다. 기쁨도 슬픔도 괴로움도 더불어 나누어야 한다. 기쁨을 나누면 온 세상이 더욱 기뻐지고, 슬픔과 괴로움을 서로 나누면 그 슬픔과 괴로움이 소멸되고 대신 기쁨이 샘솟게 되는 것이다.”

한승원

193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목선〉이 당선되며 활동을 시작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소설 원효〉, 〈초의〉, 〈다산〉 등 다수의 소설을 쓴 이 시대의 대표 소설가다. 고향 율산마을에서 바다를 시원(始原)으로 한 작품을 써오고 있다. 현대문학상  ·  한국문학작가상  ·  이상문학상  ·  대한민국문학상  ·  한국소설문학상  ·  한국해양문학상  ·  한국불교문학상, 미국 기리야마 환태평양 도서상  ·  김동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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